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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토론] 재난관리체계 어떻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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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올 들어 대구지하철참사.물류대란.사스.태풍 '매미' 등 대형 재난이 잇따르면서 정부 각 부처와 지방자치단체에 복잡하게 흩어져 있는 재난관리체계를 일원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정부 관계자와 전문가들이 좌담회를 열고 국가 안위까지 뒤흔들 수 있는 대형 재난을 예방하고 유사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했다.

*** 참석자

▶ 權 郁 행자부 민방위재난통제본부장

▶金燦五 서울산업대 교수.안전공학

▶金根永 강남대 교수.도시공학

▶李元熙 한경대 교수.행정학

사회=김우석 전국팀장

▶사회=정부 13개 부처와 전국의 지자체들이 70여개나 되는 관련법을 근거로 연례행사이다시피한 태풍에 대비하지만 매번 당하기만 하고 피해마저 커지는 경향입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겁니까.

▶김찬=시스템이 문제입니다. 미국.일본 같은 나라는 둑을 쌓아 홍수를 막고 유사시 주민을 대피시키는 데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는 예방.대비는 뒷전이고 물에 빠진 사람 구하고, 이재민 거처 마련이나 침수가옥 복구비 지원 등 사후 대응이나 복구에 치중하는 시스템이죠. 1억원이면 예방.대비가 가능한데 10억원 들여서 복구하고, 쉽게 잊고 지내니 피해 규모가 날로 커질 수밖에요.

▶權=어느 한 분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국민의 안전의식도 중요해요. 민방위훈련을 하고 홍보도 해보지만 효과가 안 나타나요. 태풍의 특징이나 지역 특성에 따른 구체적인 대비 매뉴얼이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태풍 때 부산과 마산의 주민들이 대형 재난에 어떻게 대비했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확연히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김근=국민의 안전의식 부재는 상당 부분 정부에 책임이 있습니다. 겨울마다 '화재 조심합시다'라는 플래카드를 내거는 것은 홍보도 교육도 아닙니다. 실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한 세부 실천 매뉴얼이 만들어지고 이를 국민에게 체득시키는 교육이 필요하죠. 정부 표준 매뉴얼에 작성자 이름만 행자부에서 지자체로 바꿔치기 해놓고 해당 지자체의 고유 매뉴얼인양 포장한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李=가장 심각한 건 재난 관련법이 통합.조정되지 않고 제각각이란 것입니다. 현장에서는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판인 데 총지휘자가 없어 우왕좌왕이고, 중앙에선 부처 간 책임 공방으로 시간을 허송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았습니까.

▶사회=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재난관리체계 일원화'가 국가적 화두로 대두된 것 아닙니까.

▶김근=소방방재청 입법예고에는 태풍 매미가 결정적 계기가 됐지만 재난관리체계를 잘 짜는 일은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로 가는 데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관문입니다. 충격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고성장기와 달리 2만달러 소득시대의 저성장기에는 국가 안정성 확보가 경쟁력의 관건입니다. 순간적 재난은 재기불능의 치명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김찬=일본이 경기침체의 늪에 빠진 원인의 하나로 1995년 고베 지진이 꼽힙니다. 세계적인 물류 중심지 고베항이 초토화됐는데 8년이 지난 현재까지 당시 인프라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산항이 반사이익을 봤지요. 당시 떠난 외국 선사들과 해외투자자들은 일본의 안전성에 대한 의혹을 접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權=정부도 이 같은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소방방재청 신설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평시에는 각 부처에서 하고 있는 재난관리 업무를 총괄 조정하고, 유사시 주민 동원.대피령을 발동하고 응급구조에 나서는 등의 대비.대응업무를 한 곳에 맡기자는 겁니다. 재난대비 체계가 시스템화.전문화되고 사후복구개념도 예방개념으로 전환될 겁니다.

▶사회=현재 정부의 입법안대로라면 대형 재난이 닥쳐도 큰 문제가 없겠습니까.

▶김찬=이번 태풍 때 울산 북구 사례를 짚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 지역에선 인명피해는 물론이고 어선.양어장에 아무런 흠집도 나지 않고 넘어갔어요. 북구청 수산담당직원 한사람이 해낸 겁니다. 어민들은 "제발 귀찮게 굴지 말고 추석이나 쇠러 가자"고 외면했지만, 그 사람은 "태풍이 오지 않으면 어선을 대피시키는 데 든 비용은 내 집을 팔아서 갚아주겠다"고 설득하면서 조치를 취한 겁니다. 이처럼 현장에서 담당자들이 스스로 나서도록 중앙 정부가 지원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게 재난관리체계 개편의 핵심이 돼야 합니다.

▶김근=소방방재청 신설은 노무현 대통령의 선거공약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그런데 각종 대형 사고가 잇따르면서 '대형 재난사고가 발생했을 때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는 명분과 선거공약이 뒤섞여 모양새가 이상해진 것입니다.

▶李=재난관리체계 일원화가 이슈로 떠오른 계기가 재난 현장의 지휘계통 혼선에서 비롯됐다는 점도 주목해야 합니다. 소방방재청 신설 준비 과정에서 민간인 대표로 참여했던 전문가가 '현장 대응 일원화'는 뒷전으로 밀려나는 등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계를 느끼고 사표를 던지기도 했습니다.

▶사회=정부가 재난관리체계 일원화의 모델로 미 연방재난관리청(FEMA)을 꼽고 있는 걸로 아는데 소방방재청도 FEMA처럼 만들면 안 됩니까.

▶李=미국에서는 국토안보부(DHS)가 30여개 연방 부처.청.국 조직이 맡고 있는 국가위기관리 기능을 총괄조정하고, FEMA는 그 가운데 재난이 임박하거나 닥쳤을 때 현장대응 업무만 맡는 독립 외청입니다. 처음엔 현장 대응 조직으로 출발해 예방기능은 물론 국가안보 전반을 조정하는 역할까지 담당했다가 9.11 이후 만들어진 DHS에 대부분의 역할을 넘겨주고 다시 대응 중심 기능으로 돌아온 거죠.

▶權=미국은 모든 게 주(州)정부 중심이어서 재난 관련기관을 주지사가 관할하고 FEMA는 주정부에 대한 지원에 충실할 뿐입니다. 소방.경찰 모두 현지 기초단체장 통제에서 벗어나 있고, 조직의 재난담당 직원이 2~3명뿐인 우리 지자체 실정에선 FEMA를 복사해 올 수는 없어요.

▶사회=우리에게 가장 이상적인 재난관리체계는 어떤 모습일까요.

▶김찬=예방.대비.대응.수습복구에 걸친 4단계 재난관리 단계에 대한 기획.평가는 행자부의 별도기구가 맡도록 하고, 소방방재청은 지자체에 대한 지원계획을 수립.집행하는 체제가 바람직합니다. 소방서 등 기존의 소방 관련 하부조직은 지방자치단체장이 인사권을 갖도록 흡수시켜 일원화하는 게 좋을 듯하고요.

▶사회=중앙조직을 행자부와 소방방재청으로 이원화하자는 것입니까.

▶김찬=대부분의 기능은 소방방재청에 맡기고 행자부는 청 단위로는 도저히 해결 안 되는 부분, 예컨대 관련 부처 조정업무를 맡는 방식입니다.

▶權=재난관리체계의 일원화라는 게 어느 특정분야의 사람들이 모든 재난을 맡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초점은 다양한 재난 분야별로 전문가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현장에서 일사불란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어떻게 만들어내는가입니다.

▶김근=소방방재청은 대응기능만 특화시켜 행자부 외청으로 두는 게 맞습니다. 이건 이원화가 아닙니다. DHS도 분야별로 4개 본부를 두고 국가 전반에 대한 위기 대응 문제를 조율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FEMA도 DHS에서 대응기능 전문기구로 독립한 거고요.

▶김찬=소방 하부조직이 지자체에 흡수되기 어렵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차선책으로 소방방재청 역시 소방의 본래 역할인 대응.수습기능만 가지고 독립하는 방안을 검토할 만합니다. 예방.대비업무는 행자부가 맡아 일선 지자체를 통해 이뤄지도록 정비해서 소방청 조직과 협조체계를 갖도록 하면 됩니다.

정리=이기원 기자<keyone@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