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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좋은 홍삼 드세요" 뉴질랜드 공항서 인심 쓴 까닭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14) 

스코티시 블룸이라고 부르는 노란 꽃으로 뒤덮인 퀸스타운 공항. [사진 박재희]

스코티시 블룸이라고 부르는 노란 꽃으로 뒤덮인 퀸스타운 공항. [사진 박재희]

첫 번째 환승지는 나리타였다. 커피를 사려고 줄을 서는데… 어랍쇼? 일본사람들은 카운터가 아니라 나를 바라보며 돌아섰다. 수줍은 표정으로 우물쭈물 움직이면서. ‘뭐지? 내 얼굴에 뭐 묻었나?’ 1.7초쯤 어리둥절 하는 찰라 등 뒤로 여배우의 간절한 대사가 들린다.

“당신 어떻게 나한테 이래요? 흑~흑~흑~”
그럼 그렇지! 왜 나를 향해 줄을 서겠나? 사람들은 내 뒤에 있던 TV를 보고 싶은 거였다. 한류가 한풀 꺾였다지만 공항의 100인치 TV는 한국드라마를 보여주었다. 자막을 읽으려고 좌우로 까치발을 옮기며 필사적으로 가시각을 확보하려던 게다. 인기 절정 드라마임이 틀림없는데 드라마에 젬병인 나는 도통 무슨 사연인지 알 수 없다.

여자는 억울하고, 남자는 믿지 않고. 뭐 그 정도가 내가 이해한 전부인데 드라마는 대체로 그런 내용이 아니던가. 배우는 나의 모국어를 말하고 있는데, 정작 그녀에게 공감하며 애끓어 맘을 졸이는 쪽은 내가 아니라 일본어로 자막을 읽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배우는 내가 아무런 수고 없이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녀와 불통했다.

한국어가 울려 퍼지는 외국의 대합실에서 유일한 불통자가 되어 타자의 공감과 소통을 구경하는 기묘한 체험이었다. 그래 맞다. 통한다는 것은 언제나 말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

출발은 떠남을 전제한다. 익숙한 땅, 태도, 사람들과 멀어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새로움을 향해 출발했다는 것을 알았다. [사진 박재희]

출발은 떠남을 전제한다. 익숙한 땅, 태도, 사람들과 멀어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새로움을 향해 출발했다는 것을 알았다. [사진 박재희]

순간 나는 우리가 떠나고 싶어 한 이유를 생각했다. 일상과 늘 소란스러운 말에서 떠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말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숨어 있는 마음을 만나고 싶었던건 아닌가 하고. 좀처럼 말 걸어 주지 않으면서 고요히 관심을 기다리는 또 다른 나를 알아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숨어있는 자신에게 말 걸어주기에 여행보다 좋은 방법은 별로 없으니까. 막연하기만 한 새로운 시작도 결국 자기를 알아보는 지점에서 시작될 테니까. 낯설고 기대했던 내가 아닐지라도 여태 소리 내지 않았던 내게 귀 기울이고 그 마음을 들어보겠다고 나선 길이었다.

복도도 창가도 아닌 가운데 자리, 식어 빠지고 냄새나는 기내식, 계속 울어대는 어린아이… 장시간 비행에서 견디기 힘든 것이 많다. 의자를 뒤로 젖혀서 코에 닿게 하는 사람까지 이코노미석에만 해당하는 고충도 있고 발 냄새나는 옆 사람, 계속 말 붙이는 승객처럼 부푼 여행 기분의 바람을 빼는 수많은 요소가 비행기 안에 있다.

기내 안전영상은 늘 지루하고 뻔하다는 상식을 깨 준 항공사, 중요한 것일수록 진지하기보다 힘 빼고 재밌게 해보면 어떨까? 보는 사람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너무 간단한 원리인데 지키기는 힘들다. [사진 박재희]

기내 안전영상은 늘 지루하고 뻔하다는 상식을 깨 준 항공사, 중요한 것일수록 진지하기보다 힘 빼고 재밌게 해보면 어떨까? 보는 사람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너무 간단한 원리인데 지키기는 힘들다. [사진 박재희]

복도에 엉성하게 선 승무원의 시범 동작과 안전수칙 영상을 봐야만 하는 것도 고역이었는데 그날은 예외였다. 호빗과 반지의 제왕을 소재로 한 안내 영상에서 난 리셋을 찾아 떠난 우리에게 필요한 첫 번째 힌트를 본 것 같다. 평범하고 지루한 소재라도 얼마든지 재미있을 수 있다는 깨달음. 비밀로 삼기에 시시할 만큼 기본적인 가장 중요한 열쇠였다. ‘온전히 빠져서 즐기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 즐기면 되는 거다. 아니 즐겨야만 하는 거다.

내가 지금 제대로 사는 건지에 대한 기준도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한 방법도 ‘즐거움’에 두리라 마음먹었다. 일단 즐거워하자! 즐겁지 못하다면 씻지도 못하는 생 야생의 걷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출발은 언제나 떠남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속했던 세상을 떠나 새로운 시작, 즐거움을 향해 출발한 것이다.

날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날개만이 아니다. 꼿꼿하게 세운 꼬리도 절실하다. [사진 박재희]

날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날개만이 아니다. 꼿꼿하게 세운 꼬리도 절실하다. [사진 박재희]

“유 노 레드 진생? 코리안 레드 진생. 홍삼이라고요.”
허 교수는 측은지심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한쪽 팔엔 육포 다른 팔엔 홍삼을 껴안고 서서 애원했다. 선량한 비굴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일제히 간절한 눈빛 레이저를 발사하며 호소했지만 검수원은 엄격하고도 단호하다. 일정한 박자로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반입 불가, NO”를 선언했다.

가망이 없어 보이는 건 육포와 홍삼만이 아니었다. 초딩 입맛 어른의 간식을 챙겨온 박 팀장도 고전 중이다. 소시지 모양일 뿐 밀가루와 대두로 만들어진 간식이라고 설명했다. 어찌하여 ‘천000 소시지’가 육류가공품이 아닌지, 진짜 소시지가 아니라는 걸 거듭 설명했지만 끝내 이해시키지 못했다. 무게를 줄이겠다고 포장지를 모두 버리고 온 탓도 있었지만 사실 한국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소시지가 아닌 소시지를 먹는단 말인가.

뉴질랜드 입국 수속은 뉴욕에 뒤지지 않을 만큼 번거롭고 까다롭다. 미국인들이 테러리스트, 마약범죄자, 불법체류자 후보 취급을 하면서 사람 속을 뒤집는다면 여기 검색원들은 예의 바르고 친절한 고집불통이라고나 할까?

공기가 빛처럼 밝은 퀸스타운에 도착했다. [사진 박재희]

공기가 빛처럼 밝은 퀸스타운에 도착했다. [사진 박재희]

뭐든지 대충대충 되는대로 하는 나와 달리 허 교수는 나름 준비 주의자다. 그녀가 ‘서프라이즈’를 외치며 선사하려던 것은 원정대를 위한 홍삼편과 특별 주문 한우 육포였다. 그런데 뉴질랜드에 도착하자마자 맛도 못 보고 송두리째 폐기될 위기에 그녀의 어깨는 축 처져 허리까지 내려갔다.

“흑흑흑~ 외국 육포는 너무 짜길래 특별 주문한 건데… 홍삼편도 부피 줄이려고 포장 다 뜯고…….”
그녀는 울기 직전이었고 우리도 울고 싶었다. 아쉬움의 옹알이를 그치지 않던 허 교수는 가져갈 수 없다면 여기서 다 먹는 건 어떨까? 하더니 또박또박 검수원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몸에 좋은 거예요. 한 번에 서너 개씩 드세요. 감기에도 좋고 피로에도 좋고 블~라~블~라~”
애초부터 검색대원들에게 나눠주려고 가져온 사람처럼 그녀는 열성이다. 홍삼 아가씨와 육포 아줌마 열 명 몫은 너끈히 했던 허 교수가 남긴 교훈은 이거다. 못 먹는 감, 남이라도 주자!

뉴질랜드에는 이 땅에만 서식하는 수십만 종의 식물이 있다고 한다. 운동화 바닥, 등산스틱, 신발 밑창까지 모두 검사하는 이유다. 뉴질랜드를 제외하면 운동화 밑창을 들게 하고 바닥 흙을 채취해서 검사하는 공항은 없었던 것 같다. 자국의 자연 생태계를 해칠만한 그 어떤 것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강철 의지. 그 의지를 확인하며 우리는 홍삼편과 한우 육포 그리고 소시지인 듯 소시지 아닌 소시지 같은 너~ 천하장사를 포기했다.

퀸스타운 공항에서 탄 택시. 택시 운전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에게 받은 화폐를 모으는 취미가 있다고 했다. 작은 것에서 기쁨을 찾는 능력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사진 박재희]

퀸스타운 공항에서 탄 택시. 택시 운전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에게 받은 화폐를 모으는 취미가 있다고 했다. 작은 것에서 기쁨을 찾는 능력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사진 박재희]

럭셔리 관광은커녕 샤워조차 못 하는, 와이파이는 고사하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으로 오로지 걷기 위해 가면서 편안한 노선을 탈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최대한 싸게’를 원칙으로 구매한 항공편은 매우 불친절했다.

첫 번째 환승지 나리타공항에서는 대기시간이 길어 단행본 한 권을 다 읽었고 남극 방향으로 12시간 넘게 날아 도착한 크라이스트처치에서는 30분 간격으로 탑승지연 방송이 나왔다. 쉬는 것도 아닌 대기모드로 다섯 시간을 보내면서 피로와 꾀죄죄함으로 초절임이 돼서야 비행기를 탔다.

살면서 실망하는 이유는 특정 사건 자체보다는 지급가치에 비해 기대가치를 너무 크게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유독 까다로운 짐 검사를 거치며 회심의 특식마저 모두 빼앗겼으니 결국 우리의 항공권은 기대보다는 덜 싸고, 예상보다는 더 고된 여정이었다. 퀸스타운에 도착했다.

박재희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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