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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의 노동자는 단결하지 못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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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광기
김광기 기자 중앙일보 에디터
김광기 경제연구소장·논설위원

김광기 경제연구소장·논설위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사회적 책임을 다하자.”

민노총의 ‘만국 노동자단결’ ‘사회적 책임’ 구호는 궁색 #기득권 노조 양보 없이는 혁신성장도 일자리도 공염불

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집회에 최근 등장한 슬로건이다. 특이하고 흥미롭다. 민노총도 뭐가 문제인지 알고 있구나, 그러나 해법치고는 궁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성 노조 때문에 투자할 의욕을 잃었다는 기업인이 많다. 기업이 신규 사업을 해외로 돌리는 현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일자리를 밖으로 내쫓고 있는 셈이다. 세계화는 대세로 굳어졌다. 투자에도 소비에도 국경은 별 의미가 없다. 세계 각국은 한 푼의 외자라도 더 유치해 일자리를 늘리려 혈안이다.

민노총도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 돌파구가 엉뚱하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카를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에서 171년 전 외쳤던 구호가 한국에 떴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만국의 노동자가 진짜 단결하면 어떨까. 세계 각국의 임금과 노동조건이 평준화되면서 싼 임금을 겨냥한 해외 투자는 급감할 것이다. 지구촌의 고질병인 양극화도 크게 완화될 수 있다.

하지만 희망사항일 뿐이다. 마르크스 사후 1, 2차 세계대전에서 만국의 노동자들은 조국의 명령을 따라 서로 총부리를 겨눴다. 오늘날 글로벌 경제전쟁에선 노동자들이 자국 기업 및 정부와 연대해 타국의 일자리를 빼앗아오기 위해 싸운다. 선진국·신흥국 가릴 것 없이 노·사·정이 대타협으로 뭉치는 추세다. 한국만 예외다.

또 하나 관심을 끄는 게 “사회적 책임을 다하자”는 구호다. 민노총과 한국노총은 문재인 정부 들어 공전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조합원 수가 지난해 10%나 늘었다. 한노총이 100만명, 민노총은 90만명을 넘어 양대 노총 조합원 수가 200만명에 육박한다. 그런데 양대 노총 조합원은 80% 이상이 대기업과 금융회사, 공공 부분에 속한다. 300인 이상 기업의 노조 조직률이 60%에 달하는 반면 30인 미만 중소기업은 고작 0.2%에 불과하다.

양대 노총에는 연봉이 8000만~1억 원에 달하는 고소득 조합원도 상당수다. 귀족노조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양대 노총 조합원과 중소기업·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임금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민노총이 ‘사회적 책임’을 들고나온 배경이다. 자기 몫만 챙기는 기득권 집단이라는 비판을 의식한 것이다. 조직을 갖지 못해 힘이 없는 약자들의 이익을 대신 찾아주겠다는 얘기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건설현장에선 민노총 등 조직화된 노동자들이 자기들에게 일자리를 우선 배정하라고 장벽을 치기 일쑤다. 남의 일자리 가로채기다. ‘광주형 일자리’ 타협을 가로막고 있는 것도 기득권 노조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끌어올리라는 비현실적 주장만 되풀이할 뿐, 정규직 노조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위해 양보할 의향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새해 들어 달라진 행보를 보이고 있다. 경제·민생 분야의 성과를 강조하며 기업의 혁신과 투자를 적극 돕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현장과 소통을 위해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 오너들도 만나고 있다. 그러나 규제 좀 풀고 예산을 지원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노동시장 개혁을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 강성 노조에 끌려다니는 정책으로는 기업에 혁신과 투자 의욕을 불어넣을 수 없다.

문 대통령은 민노총에 대한 촛불 부채의식에서 이제 벗어날 때가 됐다. 국민 전체를 보며 일자리가 생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매진해야 한다. 기업가 정신이 살아나고 금융시장이 작동하면 정부 예산 없이도 혁신성장은 얼마든 가능하다.

촛불혁명이 성공한 것은 광범한 중산층과 중간층이 동참했기 때문이다. 민노총과 시민단체들이 투쟁의 멍석을 깐 것은 맞다. 하지만 큰 이슈가 있을 때마다 으레 하는 행동이었다. 강남의 아줌마들까지 가세하지 않았다면 촛불혁명과 탄핵은 불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문 대통령이 기업과 중산층의 마음을 잡지 못하면 집권 후반기의 개혁 성과도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김광기 경제연구소장·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