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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퇴원 직전 재입원할 위기 놓인 스페인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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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논설위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논설위원

PIIGS. 유럽의 병자(病者)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조어다. 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을 지칭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런 묶음형 단어가 탄생했다. PIIGS는 경제 폭풍이 불자 힘 한 번 못 쓰고 와르르 무너졌다. 그만큼 경제 구조가 취약했다는 뜻이다. 공공부문은 비대하고, 노동시장은 경직돼 있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나 유럽연합(EU), 국제통화기금(IMF)은 병석에 드러눕기 전, 수년에 걸쳐 진단서와 처방전을 줬다. 그러나 PIIGS는 개혁 권고를 단박에 무시했다. “우리 경제 체질은 견고하다. 우리 길을 간다”며 귀를 닫았다. 이런 외곬 또한 PIIGS의 공통점이었다.

좌파 정부 6개월 만에 순풍 타던 경제, 충격 파열음 내 #고집과 포퓰리즘 어우러지면 시장엔 대못 경제 리스크

그러던 스페인에 좌파 사회당이 7년 만에 밀려나고 우파 국민당이 들어섰다(2011년). 이후 변신은 놀라웠다. 공무원 수를 줄이고, 법인세를 낮췄다. 정규직 해고 절차를 단순화하고, 임금을 동결하는 등 노동개혁을 단행했다. OECD 등의 처방전대로다. 마이너스 성장을 하던 스페인은 2014년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섰다. 2017년까지 3년 연속 실질 GDP 3.2%의 성장세를 보였다. 2017년에는 1인당 국민총생산(GDP·구매력 기준)이 유로존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퇴원이 임박한 듯 보였다.

그런데 지난해 하반기부터 다시 병색이 완연해지고 있다. 사회당이 재집권(2018년 6월)한 시기와 일치한다. 노동정책을 갈아엎기 시작했다.

페드로 산체스 총리는 월 859유로이던 최저임금을 올해부터 월 1050유로(약 134만3000원)로 올렸다. 무려 22.3%의 인상률이다. 이걸 총리령으로 강행했다. 집권 사회당이 소수인 하원에서 통과될 것 같지 않자 취한 조치다. 가파르게 올렸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월 최저임금(174만5150원)보다 23%나 적다. 그런데도 스페인 내외부에선 경제 충격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산체스 총리는 더 나아가 “공무원 임금도 올리겠다”며 “법인세를 인상해 충당하겠다”고 했다.

스페인 중앙은행은 지난달 14일 올해 실업률 전망치를 1%포인트 상향 조정했다. 최저임금 인상이 15만개의 일자리를 날리고, 저숙련·청년층에 직격탄이 될 것이란 분석을 곁들여서다. 파블로 에르난데스 데 코스 중앙은행 총재는 “경제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취한 각종 개혁 가운데 핵심은 노동개혁이다. 국민당이 단행한 노동개혁은 긍정적 효과가 많다. 번복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IMF도 지난해 말 스페인의 경제성장률을 하향 조정하며 경제개혁 추진을 권고했다. IMF는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힘들게 단행한 개혁의 긍정적 효과가 아직까지는 지속되고 있으나 위험변수가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에둘러 산체스 정부의 정책 리스크를 부각한 셈이다. 그러면서 “기존 노동개혁의 기본틀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개혁이 스페인 수출 실적 향상에 20%가량 기여했다”는 자체 연구결과를 덧붙여서다. 또 “22% 인상을 추진하고 있는 최저임금은 비숙련 청년의 취업기회를 줄이게 될 것”이라고 했다. 특히 IMF는 “임금인상은 철저히 기업의 생산성 향상에 연동되어 기업의 경쟁력 손실을 방지해야 한다”는 상식까지 새삼 일깨웠다.

고질병 재발은 스페인 사회당이 집권한 지 6개월 만에 벌어졌다. 스페인을 한국으로 바꿔보면 어떤가. 다른 게 있다면 한국에선 스페인 중앙은행처럼 정부 정책을 대놓고 비판하는 기관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 국책연구기관조차 정부 입맛에 맞는 논리만 생산·제공하는 지경이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병자 꼬리표를 달고 재입원할 위기에 놓인 스페인이나 경제 위기론이 불거지는 한국이나 시사점은 같다. 위험은 고집과 포퓰리즘 같은 정치 리스크에서 탄생한다는 점이다. 리스크가 현실화하고 있는 한국에서 노동개혁은 아직 금기어다. 이러면 ‘중장기 경제전망’을 굳이 내놓을 필요도 없다. 경제가 어떻게 될지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으니 말이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