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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문화

21세기형 여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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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타블로이드판을 채우는 할리우드 커플들의 일상사를 보다 보면 그리스.로마 신화를 떠올리게 될 때가 많다. 그들의 삶은 땅 위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삶과는 무엇인가 다르다. 그러나 아주 높은 곳에 사는 신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엄격하고 고상한 도덕률을 지닌 존재들은 아니다. 그들의 남다른 탐욕과 방탕함과 무모함은 참으로 한심해 보이기 일쑤다. 그래도 어떤 이들에겐 쉽게 손가락질을 할 수 없는 권위와 격이 있다. 그렇듯 굉장한 힘으로 신비감을 드높이고 있는 한 여전사가 있다. 예쁜 천사라는 이름의 여배우 앤젤리나 졸리다.

졸리는 따뜻한 엄마지만 한편 칼과 문신을 좋아하는 병적인 바람둥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졸리는 1997년 자니 리 밀러와 이혼한 후 활발한 연애 활동을 펼쳤다. 그중엔 티모시 허튼을 비롯, 자신과의 오랜 관계를 밝히며 졸리가 절대 피트랑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한 레즈비언 모델 진 시미즈도 있었다. 게다가 친오빠와 뜨거운 관계라는 소문까지 공공연했다. 또 함께 영화를 찍는 거의 모든 배우와 염문을 뿌렸다. 배우 겸 감독인 빌리 밥 손턴과 두 번째 이혼을 했고, '알렉산더'를 촬영할 땐 올리버 스톤 감독뿐 아니라 배우 콜린 퍼렐과 동시에 데이트를 하고 다녔다. 호사가들이 그녀의 연애 행각을 비꼬고 있는 와중에 '프렌즈'의 스타 제니퍼 애니스톤을 제치고 브래드 피트의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난 이런 그녀의 예측불허한 인생 드라마에 대해 어떤 냉소적 시선을 갖기가 어렵다.

누군가는 졸리와 피트의 로맨스가 전 세계를 매혹시키는 것은 고대극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우리네 서글픈 인간의 조건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방자와 춘향, 혹은 이도령과 향단이가 맺어지기 어려운 어떤 법칙, 즉 공주는 꼭 왕자와 맺어지는 서글픔의 조건 말이다. 특히 직접적인 피해의식을 느낄 수 있는 애니스톤 같은 경우는 속 좁은 질투심으로 투덜대는 사이, 뭐랄까 제대로 동정심조차 얻지 못한 채 애초에 피트와 어울리지 않는 파트너였다는 오명만 얻었다. 그도 당연한 것이, 졸리는 애초에 배우 존 보이트와 배우 마셀리니 베르트랑이라는 별들 사이에서 태어났다. 게다가 타고난 풍만한 가슴과 도톰한 입술로 사이버 비너스가 되어 세상을 매료시켰을 때, 모바일 화보를 찍어대는 게 아니라 유엔 친선대사로 제3세계 난민을 도우며 자기 혼자서 지구촌 반대편의 아이들을 입양했다. 졸리는 육체와 정신적인 면에서 우수함을 갖추게 해주는 채식주의 에어로빅 챔피언이고, 기막힌 피아노 연주자이며, 동시에 맹인들의 알파벳 교사였다. 최근 역원정출산을 시도해 이름도 낯선 나미비아에서 딸을 낳고, 딸에게 실로 누벨 졸리-피트(피트-졸리가 아니라)라는 독특한 이름과 함께 아프리카 여권을 선물했다. 생각해내기도 힘든 온갖 품위를 다 갖춘 진정으로 강하고 아름다운 가족의 탄생이었다.

특이한 건 이 어떤 결정의 흔적에서도 피트의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졸리의 인생은 졸리 스스로의 결정과 욕구에 의해 움직이는 듯하다. 어떠한 추문이나 유혹도 그녀의 행로를 흔들지 못하는 듯하다. 그녀의 행동들이 단순히 막강한 경제력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남다른 철학에서 출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이를 낳고도 피트의 청혼을 거절하고 여전히 새로운 아이를 입양하기를 꿈꾸고 있는 졸리. 다른 스타들이 대저택 사진을 공개하고 있을 때, 인류애의 대의를 옹호하며 여러 아이들의 엄마로 스스로를 재생시킨 31살의 사이버 여전사 라라 크로프트. 왠지 그녀를 진정한 의미의 21세기형 여전사로 부르는 것에 이의를 달기 어렵다.

민규동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