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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내부고발…종교ㆍ시민단체→언론→팟캐스트ㆍ유튜브까지

중앙일보

입력

번쩍거리며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없었다. 둘러싼 ‘지원군’도 없었다. 얼굴을 감추는 모자이크도 없었다.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와 검은색 셔츠의 정장 차림을 한 채 화면을 응시하며 앉은 30대의 청년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행정고시 합격(2012년)과 기획재정부 근무(2014년~2018년) 경력을 소개한 그는 청와대가 KT&G 사장을 교체하려고 했던 정황을 전했다.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의 내부고발 동영상이다.

전직 기획재정부 사무관이 유투브 개인방송을 통해 ’청와대가 KT&G 사장을 바꾸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영상을 올린 이는 신재민씨로 그는 올해 7월까지 기재부에서 사무관으로 근무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지난 29일 올라온 영상은 온라인을 통해 퍼지고 있다. [유튜브 캡쳐]

전직 기획재정부 사무관이 유투브 개인방송을 통해 ’청와대가 KT&G 사장을 바꾸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영상을 올린 이는 신재민씨로 그는 올해 7월까지 기재부에서 사무관으로 근무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지난 29일 올라온 영상은 온라인을 통해 퍼지고 있다. [유튜브 캡쳐]

전직 5급 공무원이 최고 권력기관인 청와대를 겨눈 내부고발이라는 점을 참작하면 파격적 형식이었다. 적절한 자막이 들어간 편집이 어우러진 것도 색다른 연출이었다. 동영상 화면 속엔 자신이 한때 고민했던 유명 학원의 광고도 붙어 있는가 하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전하며 후원도 요청했다. 내부고발 동기에 대해서도 ‘사회 정의’보다는 ‘자신에게 떳떳하기 위해서’를 앞세웠다.
그의 첫 번째 동영상은 게시한 지 5일만인 3일 현재 23만9430건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는 1일 ‘신재민 전 사무관의 1일 두 번째 글’이라는 동영상을 올려 청와대의 적자 국채발행 시도를 추가로 폭로했다.

▶내부고발은?=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내부고발’은 ‘진실을 밝힐 목적으로 자신이 속한 기업이나 조직이 저지른 비리를 폭로하는 행위’라고 정의되어 있다. 내부고발은 세계 어디서나 민감한 주제이지만 한국은 공동체와 집단주의, 상명하복의 문화, 서열 등이 강조되는 사회여서 더욱 제약이 많았다. 따라서 내부고발에 뒤따르는 불이익 때문에 내부고발은 대개 종교계나 시민단체 혹은 언론 등과 공동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또한 피해자의 신원도 최대한 숨기는 경우도 많았다.

1992년 9월 15일 양심선언 공무원ㆍ군인ㆍ전경 시국선언 좌로부터 황원진, 양승균, 이문옥, 이동균, 이지문, 서영완 [중앙포토]

1992년 9월 15일 양심선언 공무원ㆍ군인ㆍ전경 시국선언 좌로부터 황원진, 양승균, 이문옥, 이동균, 이지문, 서영완 [중앙포토]

▶내부고발 1.0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1990년대 초반)=내부고발의 대부분은 정치 권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1986년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의 정부 보도지침 전달 폭로, 1990년 2월 이문옥 감사관의 감사원 부동산투기 감사중단 고발, 1990년 10월 윤석양 이병의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1992년 3월 이지문 중위의 군 부재자 부정투표 고발 등이 대표적이다. 이때는 ‘양심선언’이라는 명칭으로 주로 쓰였다.
신변 안전 보호를 위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 종교기관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당시만 해도 정부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언론사는 이들의 기자회견을 전달하는 정도였다. 내부고발 사건을 이끄는 ‘플레이어’로서 기능하지는 못했다.

이문옥 前감사원 감사관. [중앙포토]

이문옥 前감사원 감사관. [중앙포토]

▶내부고발 2.0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중반)=정치권력으로 한정됐던 내부고발이 안전ㆍ환경ㆍ보건ㆍ교육ㆍ경제 등 각 분야로 확장됐다. 또한 언론 자유가 신장하면서 내부고발자들도 종교기관보다는 언론과 직접 소통하며 이슈 파급력을 끌어올렸다.
1996년 11월 LG전자 감사팀 직원 정국정씨의 자재 구매비리 폭로나 2003년 7월 적십자사 혈액사업본부의 김용환·이강우씨의 부실한 혈액관리 실태 고발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2005년엔 황우석 교수의 논문조작과 연구윤리위반에 대한 내부 제보가 터져 나오며 사회를 뒤흔들었다.

2006년 6월 20일 오후 불구속 기소된 황우석 박사가 서울중앙지법에서 `줄기세포 논문조작` 사건 첫 공판을 받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2006년 6월 20일 오후 불구속 기소된 황우석 박사가 서울중앙지법에서 `줄기세포 논문조작` 사건 첫 공판을 받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하지만 언론사에 제보한 이들은 대개 자신의 얼굴이나 신분을 노출하는 것을 꺼렸고, TV 화면에서도 모자이크 처리가 되거나 음성변조를 통해 신원을 감추는 방법이 사용됐다.

▶내부고발 3.0 (2000년대 중반 이후~2010년대 중반)=내부고발의 과녁이 청와대 등 권력의 핵심기관까지 올라갔다. 또한 대안 미디어 성격을 지닌 온라인 플랫폼이 성장하면서 외부 단체나 언론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이슈를 확산시킬 수 있게 됐다. 2008년 5월 김이태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이명박 정부의 ‘한반도 대운하’ 사업 추진을 포털사이트 다음의 아고라에 게시해 큰 화제가 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2012년 3월 21일 서울중앙지검에 참고인 자격으로 출석할 때의 장진수 당시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의 모습. 그는 이명박 정부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과 증거인멸 의혹을 제기해 검찰의 본격적인 조사를 이끌어냈다. [연합뉴스]

2012년 3월 21일 서울중앙지검에 참고인 자격으로 출석할 때의 장진수 당시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의 모습. 그는 이명박 정부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과 증거인멸 의혹을 제기해 검찰의 본격적인 조사를 이끌어냈다. [연합뉴스]

2010년 들어오면서 팟캐스트나 페이스북 같은 뉴 플랫폼 활용도 두드러졌다. 2012년 3월엔 장진수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이 팟캐스트 ‘이슈 털어주는 남자’에서 정부의 민간인 사찰과 관련해 당시 상관으로부터 입막음용으로 5000만원 지폐뭉치를 받았다고 고백해 파문을 일으켰다. 최고 권력층과 관련된 내부고발은 대통령의 탄핵으로 이어졌다. 2016년 11월 K스포츠재단과 더블루케이에서 근무했던 고영태·노승일씨 등은 국회 청문회에서 최순실씨의 국정농단과 관련된 비리를 고발했다. 이해 12월 9일 국회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가결했다.
지난해 1월 서지현 검사는 검찰 조직의 성추문 은폐를 JTBC에 출연해 인터뷰 형식으로 전했다. 모자이크나 음성 변조 없이 앵커와 마주보며 당당한 태도로 전달한 서 검사의 폭로는 미투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대학이나 각종 직업군 등을 중심으로 페이스북에 ‘대나무숲’을 만들어 상급자의 갑질 등을 폭로하는 시스템도 정착된 것도 새로운 흐름이다.

알선수재 혐의로 긴급체포된 고영태 전 더블루K 이사가 13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체포적부심에 출석하고 있다. [중앙포토]

알선수재 혐의로 긴급체포된 고영태 전 더블루K 이사가 13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체포적부심에 출석하고 있다. [중앙포토]

▶내부고발 4.0 (현재~)=신 전 사무관의 유튜브 활용은 한 단계 더 나아간 내부고발사례라는 분석이 나온다. 팟캐스트만 해도 고가 장비나 채널이 필요한만큼 개인 자격으로 손쉽게 진행하기 어려웠지만 유튜브는 그러한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 더욱 수평적인 질서와 활발한 내부고발 문화를 정착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시민단체 내부제보실천운동의 관계자는 “과거에는 보복 때문에 신분이 노출되는 걸 두려워했지만, 요즘은 그런 단계를 뛰어넘어 적극적으로 본인을 드러낸다. 이전과 다른 내부고발의 문화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계=내부고발의 활성화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른 불이익은 여전하다. 2015년 하나고 입시부정은 서울시 교육청 특별감사 결과 사실로 밝혀졌지만 제보한 전경원 전 하나고 교사는 해임됐다. 장진수 주무관은 민간인 불법사찰과 증거인멸에 가담했다며 재판에 넘겨져 2013년 11월 대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공직을 잃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6월 27일 국정기획자문위원회롤 통해 공익신고자보호강화 방안을 발표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신재민 전 사무관도 공무상 비밀누설로 기재부에 의해 검찰에 고발된 상태다.
유성운ㆍ이병준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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