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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년 다대포 간첩, 북파공작원들이 잡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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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983년 12월 3일 부산 다대포 앞바다 무장간첩 침투 사건이 당시 정부의 각본에 따라 조작 발표됐다는 주장이 20년 만에 제기됐다.

간첩 상륙을 목격한 해안 경계병들이 총격전을 벌여 생포한 것이 아니라 군과 정보당국이 사전에 침투 정보를 입수하고 대북 침투 요원들을 동원해 생포 작전을 펼쳤다는 것이다.

국회 정무위 소속 엄호성(嚴虎聲.한나라당)의원은 24일 당시 작전에 투입된 북파 공작원들의 증언을 토대로 "아웅산 테러 사건 이후 군사정권이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상황을 왜곡했다"고 말했다. 嚴의원은 25일 국가보훈처 국정감사에서 이를 공개할 예정이다.

본지는 嚴의원이 확보한 증인으로서, 당시 작전에 투입됐던 정덕근(鄭德根.42)씨를 단독 취재했다. 鄭씨는 "'설악개발단'으로 불린 대북 공작 특수부대원 33명이 그해 11월 초부터 강원도 고성의 한 해변에서 특수훈련을 받았다"며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전했다.

◇훈련=밤마다 모래사장 등에 은거지를 구축하고 매복해 있다가 적을 가장한 대항군이 나타나면 숨을 죽이고 최대한 접근한 뒤 순식간에 덮쳐 생포하는 훈련을 반복했다.

목적이나 용도는 몰랐다. 비누와 치약 사용은 금지됐다. 적이 냄새를 맡는다는 이유였다. 그 달 말께 대장의 지시로 "이번 임무에서 죽어도 좋다"는 각서를 썼다.

◇부산 이동=12월 2일 대원 33명과 지휘관 세 명은 관광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이동했다. 창문은 천으로 가리고 식사는 차 안에서 했다. 용변은 휴게소가 아닌 갓길에서 해결했다. 민간에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아홉 시간 걸려 도착한 곳은 ○○공사로 불렸던 정보사령부 부산지사. 해안으로 침투하는 간첩을 생포하라는 작전명령이 전달됐다. 얼룩무늬 위장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D데이의 매복=12월 3일 오후 8시 다대포 해안에 도착해 5~6명씩 7개 조를 짜 모래사장과 어선 밑, 그리고 간첩의 접선 장소라고 들은 공중화장실 부근에 매복했다. 장비는 박달나무 몽둥이.대검.수갑.포승.입재갈이 전부였다. 생포하기 위해 총은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후 10시30분쯤 시커먼 물체 둘이 나타났다. 암흑 속에서 매복한 대원들과 신호줄(실)을 이용해 연락을 취했다. 그때 둘 중 한 명(전충남)이 인기척을 느낀 듯 벨기에제 무성권총을 들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화장실 안에 숨어 있던 한 대원이 몽둥이로 손을 내리쳐 제압했다. 그는 목에 걸고 있던 체코제 기관권총을 여덟발 정도 발사하며 함께 침투한 조원(이상규)에게 "수류탄 까-"라고 외쳤다.

그 순간 부근에 잠복해 있던 우리 대원들이 그들을 덮쳐 생포했다. 자살을 시도하려는 전충남과 이상규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배낭과 무기를 빼앗았다.

◇간첩선 격침=기관총 소리가 나자 그들이 타고 온 잠수정에서 해안 쪽으로 기관총과 방사포가 불을 뿜었다. 공군과 해군이 잠수정을 격침시켰다. 북한 공작원 세 명이 타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들은 생포한 간첩 두 명을 지휘부에 넘겨준 뒤 해안 주변 야산 등에 배치된 공수부대원들이 간첩 생포에 실패했을 경우 사살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긴 머리에 간첩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던 우리들을 향해 무차별 총탄이 날아올 수 있었던 상황이었음을 알아챘다.

당시 현장과 떨어진 2선에는 완전무장한 공수부대(특전사) 1개 대대 병력이, 3선에는 일반부대 1개 연대 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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