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뉴스 다시 쓰기 … 포털의 매직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가 있다. 이탈리아 인근 작은 섬에 망명한 칠레의 시인 네루다와 그를 향한 전 세계 여성들의 팬레터를 배달하기 위해 고용된 '일 포스티노'(우체부) 마리오 간의 이야기다. 마리오는 운율이 무엇인지 은유가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시가 여성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에 네루다에게 묘한 동경과 사랑의 감정을 가진다. 네루다 역시 그런 순박한 마리오에게 끌린다.

이 시적인 영화 한 편은 한국의 저널리즘 환경을 잘 은유해 준다. 네루다가 독자라면 편지를 보내오는 뭇 여성들은 뉴스 제작자다. 마리오는 뭇 여성의 편지를 네루다에게 전달하는 포털미디어다. 이 묘한 삼각관계에서 커뮤니케이션은 편지를 보낸 팬과 네루다가 아닌 우체부와 네루다 간에 이뤄진다. 편지는 이 둘 사이를 잇는 모티브에 불과하다.

포털미디어의 이 같은 지위는 전형적인 재(再)매개 커뮤니케이션 현상이다. 신문이나 방송 뉴스가 현실을 매개한다면, 포털미디어는 그러한 매개를 다시 한 번 매개한다. '다시 쓰기'로 이해되는 재매개는 특별히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할 때 뚜렷하게 작동하는 미디어 동학이다. 포털미디어는 디지털의 힘을 빌려 자신의 안마당에서 뉴스 '다시 쓰기'의 매직을 화려하게 선보인다.

'다시 쓰기'가 주목받는 것은 독특한 권력작용 때문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성경 '다시 쓰기'를 통해 성경을 이용하는 방식은 물론 이용자들의 범위까지 새롭게 정의했기 때문에 혁명적이었다. 재매개는 내용 수정이 거의 없이도 텍스트 자체의 다시 쓰기를 넘어 권력 자체를 다시 쓰게 한다. 그런 점에서 미디어의 뉴스 쓰기가 하나의 진실의 창이라면 뉴스를 다시 쓰는 포털미디어 역시 마찬가지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기성 미디어는 자신이 생산한 뉴스를 취급하는 포털미디어를 미디어도 저널리즘도 아니라고 비난하고, 정부는 여기저기 눈치 보느라 손을 놓고 있다. 이용자들이 뉴스 이용의 편리함과 선택의 재미에 빠져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세상은 뉴스가 필요하지만 뉴스를 보기 위해 특정 미디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은 듯하다.

한국 포털미디어 현상의 일차적인 동인은 기성 미디어에 기인한다. 포털미디어로 인해 저널리즘이 좀 더 피폐해졌다면 그 역시 기성 언론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포털미디어가 혁신을 통해 독자와 가까워지는 사이 기성 미디어는 과거의 향수에 취해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저널리즘으로서의 진정성과 질적 차별화에 소홀했고, 과도할 정도로 권력의 주체가 돼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결국 뉴스 이용의 환경 변화와 뉴스 콘텐트의 질적 무차별성이 포털미디어가 자라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렇다고 포털미디어가 한국 저널리즘의 대안은 아니다. 무엇보다 포털미디어는 자신의 저널리즘적 기능이 무엇인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들의 존재가 우리 사회에 어떤 기능을 주는지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이는 수년 전 인터넷신문이 등장할 때와는 전혀 다른 측면이다. 자칫 이들에게 집중된 세간의 주목이 견제되지 않는 성을 만들 수도 있다.

그저께 노무현 대통령이 포털사 대표들을 만났다고 한다. 거기에서 포털미디어의 책임이 이슈였다고 한다. 책임감의 빈곤은 뉴스 생산이 결여된, 혹은 빈곤한, 포털미디어 매직쇼의 '원죄'라 할 수 있다. 직접 만들지 않은 뉴스에 대한 애착은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포털미디어는 자신이 다루는 것이 공공재인 뉴스라는 사실에서 뉴스 이용자로부터 받는 사랑에 무한책임을 가져야 한다. 제도화는 책임을 강제하는 하나의 방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널리즘의 기본을 회복하려는 진지한 성찰이 요구된다. 특히 기성 미디어의 진지한 자기반성과 진화만이 그들에게 닥친 최악을 최선으로 바꾸는 가장 유효한 정책임을 알아야 한다.

임종수 EBS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