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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화해 기류 급속 냉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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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문익환씨의 북한 밀항과 평양에서의 정치적 활동은 정부의 남북대화 정책의 퇴조, 재야 운동권에 대한 강경 처 등 단기적으로는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길게 보더라도 통일 문제에 큰 보탬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우선 문씨의 평양에서의 기자회견, 조평 통위원장인 허담과의 9개항 공동성명 내용이 알려진 3일 고위 당정회의를 열어 지금까지의 대북 정책을 전면 재검토하고 새로운 대응방안을 마련키로 했다.
한 고위 당국자는 이날 회의 분위기가 『보수로의 회귀였다』고 표현해 자칫 냉전 논리가 되살아나는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을 주었다.
통일원 대변인의 대 북경 고문은 문익화·허담의 공동성명을『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 『통일 전선전략 노선을 드러낸 무례한 망동』이라고 규정했으며 정부는 4일 열릴 예정이었던 남북교류 협력 추진 협의회(통일원 주관)를 비롯, 8일의 북방 교류 협력 추진협의회(외무부), 10일의 남북 및 북방 교류 협력 추진위원회(국무총리)를 모두 무기 연기시켜 버렸다.
이들 회의는 남북 관계 개선 및 북방외교 추진에 있어서의 인적·물적 교류협력 지침을 만들고 지난1월 북한을 방문해 금강산 개발 계획을 합의하고 돌아왔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 회장의 2차 방북 문제를 다룰 예정이었다.
정부 한 고위 당국자가『당분간 정회장의 방북은 물거품이 된 것으로 보아도 좋다』고 말할 정도로 급속 냉각기류가 흐르고 있다.
정부는 남북 대화를 우리가 깼다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고위 당국자 예비회담, 국회회담, 체육회담, 경제회담 등 남북 당국을 창구로 한 공식회담은 계속 응할 생각이나 민간 차원의 교류는 일단 올 스톱시킨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문 목사 사건에서 대북 화해정책의 한계와 북의 전술전략에 대한 새삼스런 재평가를 한 것 같다. 결국 6공화국이 통일에의 새로운 지평인양 추진했던 대북 화해정책이 북한에 의해 철저히 역 이용당했다는 인식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지난해 7·7선언을 계기로 정부는 북한을「민족번영의 동반자」로 간주하고 인적·물적 교류를 측면 지원하면서 해외동포들의 북한 방문도 허용하고 무연탄·수산물·예술품의 직접교역을 사실상 조장해 왔다. 나아가 미·일 등 우방이 북한과의 관계개선과 교류를 확대하는 것을 묵인하는 등「낭만적 자신감」에 차 있었다.
심지어 북한 주민의 복지까지도 우리가 생각해야 된다는 말을 핵심 당국자들이 했고 통일논의의 개방을 앞세워 북한자료 및 선전물까지 무차별할이 만큼 공개했다.
이같은 개방정책은 국력과 명분면에서 타당한 것처럼 보였고 또 노 대통령 자신을 비롯, 핵심 참모들이 통일기반 조성을 국정수행의 최우선 가치에 놓고 자랑한데다 민주화 추세를 타고 좌경 세력들이 밀어붙임으로써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급속히 확산되어 왔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정부 일각에서는 문익환씨 개인의 행동 때문에 정부가 하루아침에 정책을 바꾸는 것이 또 다른 우를 범할 것이란 우려도 없지 않으나 만약 이대로 두면 북한의 개인 초청에 의한 선전·선동이 더욱 기승을 부려 남북대화 자체가 위험을 가중시킬 것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다수인 듯 하다.
여기서 인내하면 대북 정책의 창구 일원화 원칙이 근본부터 무너져 체계적인 남북관계 및 통일정책을 수행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정부는 정책 선회가 화해 노력의 유보라고 말하면서 일단 오는 12일 예정된 남북 고위 당국자 회담을 위한 3차 예비 회담에는 응할 계획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문익환씨를 실정법 위반혐의로 체포·구속했을 때 북한측의 대응을 예상하면 남북 대화는 상당기간 교착상태에 빠질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이 문씨를 숙소로 찾아가 작별인사를 나눌 정도로 특별대우를 해준 북한이 문씨 구속에 반발, 격렬한 대남 비방선전 공세와 함께 남쪽에 대화 중단의 책임을 떠넘길 것은 뻔하다. 문씨 추종 세력들에 실망을 주지 않기 외해서라도 북한은 격렬한 제스처를 쓸것이 예상된다.
이제 정부는 그토록 자랑하고 곧 뭔가 이루어질 것 같은 환상을 주어온 우리의 남북 정책이 좌초한데서 오는 국민의 실망과 울분을 수용하고 새로운 타개책을 찾아야할 책무를 안게 됐다.
당장 국내에서는 지금까지 좌경활동을 수수방관해 온 정부와 문씨 지지세력인 재야간에 격렬한 대결이 예상된다. 정부가 다수 국민의 우려를 세력화 하자면 먼저 국민이 납득할만한 정책상의 과오시인과 관계자들의 문책조치가 있어야할 것으로 보인다.
무분별한 북방·남북 정책을 성급히 추진했다가 전 국민에게 실망과 울분을 안겨준 진용이 그대로 앉아 남북정책을 추진할 때 국민의 지지는커녕 정부가 남북관계를 정권 차원의 정책으로 이용한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북 화해 정책의 계속도 좋고, 김일성의 기만적 대응에 대한 응징도 좋으나 차제에 정부의 능력과 진실성에 대한 냉철한 성찰과 정비가 있어야할 것이다. <이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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