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토고의 토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우화의 세계에서 토끼는 대개 성실보다 잔꾀를 무기로 삼는 동물로 나온다. 라퐁텐의 우화 '토끼와 거북이'에서도 그렇고 한글 고대소설 '별주부전'에서도 그렇다.

서부 아프리카 토고에서도 마찬가지다. 토끼는 일은 하지 않고 늘 남에게 물건을 빌려 쓰는 게으른 동물이다. 특히 마음씨 넉넉한 코끼리와 하마에게 자주 손을 벌렸다. 참다 못한 코끼리와 하마가 싫은 낯을 하자 토끼는 그간의 은혜는 모두 잊고 심통을 부린다. 코끼리와 하마에게 칡덩굴로 엮은 줄을 준 뒤 당기면 보물이 딸려 나올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로 이어진 줄인지도 모르고 코끼리는 숲에서, 하마는 강물 속에서 열심히 당겼다. 한참 후 기진맥진한 코끼리가 목이 말라 강가를 찾았고 하마도 물에서 기어나왔다. 그제야 속은 것을 알았지만 토끼는 달아나고 만 뒤였다.

재미있는 건 토고가 독일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도 이 우화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1884년 튀니지 주재 독일 영사 구스타프 나흐티갈이 '토고'라는 작은 어촌을 찾아갔다. 토고 최대 부족인 에웨족 말로 '토'는 물이며 '고'는 강둑이다. 즉 '강변 마을'이라는 뜻이다. 나흐티갈은 거기서 촌장의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신하 플라코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플라코는 "토고 왕 음라파는 독일 황제의 보호를 요청한다"는 문서에 "X"라고 서명했다. 글을 몰라 아무렇게나 휘갈긴 것이다. 이것이 토고를 독일 보호령으로 확정했다는 문서며 이듬해 아프리카 분할을 공식화한 베를린 회의에서 독일은 기득권을 인정받는다. 마을 이름이었던 토고가 나라 이름이 된 경위다.

잔꾀를 부리다간 결국 된서리를 맞고 마는 게 우화다. 독일 역시 토고에 4개 선의 철로를 깔고 베를린까지 연결되는 첨단 통신센터를 세웠지만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과 프랑스에 빼앗기고 말았다. 하지만 토고의 우화엔 그런 권선징악이 없다. 덩치 큰 동물을 골렸으니 그 후 삶이 고단했을 법도 한데 토끼는 또 한번 잔꾀를 써 다 쫓아 버리고 풍요로운 땅을 독차지한다.

우리의 월드컵 첫 상대 토고팀의 행태를 보자니 이 우화의 재판인 것 같아 씁쓸하다. 선악을 구분할 것도 없이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 있는 선수들이나 그만큼 믿음을 못 준 정부 모두 죽자 사자 줄을 당기는 코끼리와 하마처럼 보인다. 서로 토끼라 믿으며 말이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 불굴의 투혼을 발휘했던 역대 우리 대표팀이 새삼 자랑스럽다. 보상금보다 열 배는 더 큰 부담을 안고 뛸 현 대표팀도 마찬가지다. 한국팀 파이팅!

이훈범 week&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