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사의 미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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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앞날을 내다보며 깊이 생각하는 것을 원려라 한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이 깊고 멀리 생각하는 바가 없으면 반드시 가까이에서 걱정거리가 생긴다』는 뜻으로 그 말을 했다.
공자의 말 가운데 「절사」도 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끊어야할 일이 네 가지 있다는 것이다. 한자를 그대로 옮겨보면 무의, 무필, 무고, 무아. 이 경우의 무는 「무라고 읽는다. 『없다』『아니다』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멋대로 생각하지 말고, 한사코 이래야 한다고 무작정 버티지 말고, 고집불통이 되지 말고, 나만 내세우지 말라는 뜻이다.
집권자의 독선이 통하던 권위주의 시대는 바로 그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해 집요한 항거와 집념을 보이고 항거자의 어기찬 목소리를 분명하게 들려주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남의 목소리도 좀 들을 수 있도록 자신의 목소리를 낮추는 자제가 요구되는 시대다. 절사의 미덕이 그것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는 여기저기서 절「절사회」의 행태들이 벌어지고 있다. 자의와 고집과 자기 중심의 행동을 유일한 미덕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날 철권정치시절, 우뚝 나서서 민주주의를 외치고, 인권을 주장하고, 남북통일의 염원을 토로했던 인사들을 적지않게 보아왔다. 그들은 용기와 결단, 그것만으로도 주위의 존경을 받을만 했다.
그런 인사 가운데 한 사람이 최근 느닷없이 평양에 나타나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과 만나…』 운운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충격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는 경건한 종교인의 신분으로 고희를 살아오며 이미 청년시절엔 일제의 신사참배와 학병을 거부했고, 지난 7O년대 유신시절 이후엔 줄곧 민주구국을 외치며 4차례, 7년이나 옥고를 치렀다. 그 사실만해도 그는 값있는 생애를 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가 이 순간 서 있는 곳은 어디인가. 그는 구태여 밀항을 해야만 했는가. 그는 또 평양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난날 그 길고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을 통해 국민의 신망을 쌓아온 인사들이 어이없게 하루아침에 그것을 모두 잃어버리는 일들을 주위에서 때때로 보고 있다. 실로 원려가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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