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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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코흘리개 어린이들까지 동전 몇닢 집어넣으면 코코아나 우유가 졸졸 나오는 재미로 즐겨 사용하는 자동판매기는 이제 우리네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지난 76년 32대로 문을 연 우리나라의 자판기시장은 작년 서울 올림픽을 전후해 급속히 성장, 현재 8만대를 웃돌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자판기왕국인 미국과 일본에 비교하면 아직도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중앙일보 부설 JOINS의 조사에 따르면 87년 말 현재 일본의 자판기 보급 대수는 인구 24명당 1대, 미국은 42명당 1대 꼴인데 비해 우리는 7백67명당 1대 꼴이다. 더구나 미국과 일본에서는 자판기가 24시간 영업을 하는 「무인 슈퍼마킷」구실을 하는데 비해 우리는 코피(72·8%), 깡통유(8·3%). 냉음료(3· 3%), 담배(2·7%)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자판기의 위생관리상태가 엉망인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국립보건원과 한국부인회가 서울시내 역·병원 등에 설치된 자판기의 코피·우유·율무차등 12개 품목을 수거, 검사한 결과 일반세균이 1㎖에 801백50마리가 검출되었을 뿐 아니라 대부분 비위생적으로 제조된 종이컵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어떤 자판기 안에는 청소용 걸레가 들어있기도 했다.
안 그래도 도시와 농촌 할 것 없이 온 나라가 먼지와 아황산 가스, 농약 등으로 오염되어 먹을 것을 마음놓고 먹지 못하고, 마실 것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며, 숨마저 제대로 쉬기 어려운 형편인데 문명의 이기인 자판기마저 세균의 온상으로 등장했다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원래 자판기는 깨끗한 물, 신성한 물을 마시게 하기 위해생겨 났다. 기원전 215년 이집트의 사원에서 성수를 물통에 담아 자동판매 한 것이지 시초인데, 요즘 돈으로 1천2백원정도의 주화를 물통에 올려놓으면 그 무게로 구멍이 열리고 성수가 흘러나오게 설계되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자판기의 경우는 기계의 결함이라기 보다 그것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무지와 태만이 이런 결과를 빚어냈다. 문명의 이기도 결국 사람의 손에 의해 약이 되고 범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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