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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부도 손 못댄 「각하의 공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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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컴퓨터 제어기기로부터 문화예술작품에 이르기까지「문명의 정수를 땅 밑으로 옮겨놓았다」는 지하철이 노사분규로 1주일째 절름발이 운행이다.
시민의 발이 된 서울지하철의 역사는 고작 15년. 그러나 그 15년은 숱한 우여곡절과 시행착오가 점철된 연륜이었고 아직도 시험은 계속중인 셈이다.
장안의 명물이던 전차가 서울에서 사라진 2년 후인 70년 6월 김명년(전 지하철공사사장)·안상영(현 부산시장)씨 등 6명이 시청에 모여 「서울지하철건설본부」간판을 걸었다. 「지하철」이란 용어가 처음 햇볕을 본 것이다.
71년 4월부터 시작된 서울역∼청량리사이의 9·5㎞ 1호선공사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에 이어 지대한 관심을 보인 대 토목공사.
「각하의 사업」이었기 때문에 서울지하철 건설본부는 공사가 끝날때까지 기세좋던 중앙정보부나 감사원 감사조차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뒷 얘기를 남겼다.
『눈뜨면서부터 눈감을 때까지 오로지 땅만 파면됐다』고 기억하는 당시 관계자는 『비슷한 시기에 평양에서도 지하철공사가 진행돼 박대통령의 관심을 더욱 부채질했을 것』이라고전한다.
1호선은 서울시내 지하철구간 중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유일한 좌측통행. 접속되는 철도청 전철구간이 모두 좌측통행이므로 1호선구간도 그대로 좌측통행으로 연결시켰다.
『우측통행인 지상과 방향이 정반대라 버스에서 내린 승객이 1호선을 이용할 때 아직도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는 서울시 관계자는 당시 용산이나 남영역 부근에서 고가철도를 놓아 X자형 교차로를 만들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하고 있다.
서울시가 철도청과 맞선 또 하나의 문제는 전동차 전기공급방식.
비교적 역 사이의 거리가 먼 철도청 전철은 송출때 전력손실을 줄이기 위해 교류25㎸ 고압식을 사용한데 비해 서울시는 『도심지에 고압전류는 위험하다』고 맞서 짧은 구간에 기동력이 뛰어난 직류 1천5백V의 사용을 관철시켰다.
우여곡절 끝에 1호선이 완공된 74년 8월15일.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날 개통식 직전에 열린 광복절기념식에서 육영수여사가 저격당해 숨지고 말았다.
개통식이 초상집으로 변한 이날부터 『해냈다』는 자부심으로 1호선에 투입됐던 1천여명의 직원과 장비들로 곧바로 2호선공사에 들어가리라 꿈에 부풀어있던 서울시는 불상사를 맞은 웃분의 심경을 헤아려 (?) 그후 4년동안「지」자조차 꺼내지 못한채 단계적으로 직원을 감축할 수밖에 없었다. 난지도 서부위생처리장 옆에 산더미처럼 쌓여 노랗게 녹이슬던 철제빔들이 다시 먼지를 턴 것은 78년3월.
2호선 30㎞의 강남구간이 착공된 것이다.
이에앞서 당시 막강했던 패자춘 시장은 2∼4호선에 차관을 빌려준 일본측이 자기들 식으로 우이동∼강남, 불광동∼영등포를 잇는 정자형 노선을 제시했으나 특유의 뚝심으로 거절, 서울시가 마련한 안대로 오늘처럼 X字형 3, 4호 노선을 확정했다.
2호선 건설에서 최대의 논란은 뚝섬일대구간을 지하로 할 것인가, 고가로 할 것인가의 문제.
토질이 연약한데다 물기가 많다는 서울시의 지적에 따라 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모처럼 (?)결단을 내려 고가로 결정했지만 개통식때 지하철을 타고 지나던 전두환 전대통령이 이 일대에 영세공장이 밀집한 것을 보고 『올림픽이 코앞인데 저것이 무엇이냐』며 역정을 내는 바람에 많은 공장들이 한꺼번에 지방으로 이전해야하는 엉뚱한 수난을 겪기도 했다는 뒷 얘기도 있다.
지하철건설은 서울시가 시행하는 최대의 토목공사인 만큼 시청기술직공무원 중 엘리트가운데 엘리트로만 선발해 투입했다.
따라서 지하철건설이 끝날때마다 참가요원들은 논공행상으로 포상을 받거나 승진에 승진을 거듭, 능력을 인정받은 당시 실무자의 대부분이 현재 서울시의 요직을 맡고있다.
그러나 82년 3호선 현저동 공사장 매몰사건으로 당시 박영수 시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 명암이 엇갈리기도 했다.
이 사건 후에야 비로소 공기단축만을 앞세워 그 동안 밀어붙이기 식으로 진행되던 공사방식에 제동이 걸려 공사장에는 「선 안전 후 공사」의 표어가 나붙기 시작했다.
인재는 그 뒤에도 끊임없어 3, 4호선 건설을 총지휘하던 김재명 지하철공사 초대사장이 「공사」에는 귀재였으나 「공사」의 운영에 실패해 지난해 노조파업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또 1호선 건설 때부터 지휘를 맡아와 「지하철의 산증인」으로 불리던 김명년 사장조차 이번 파업으로 백기를 드는 바람에 『앞으로는 지하철보다 사람을 아는 게 더 중요하다』는 지적이 설득력있게 대두되고 있다. <제정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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