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평가이후가 더 중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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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수개월동안 혼미를 거듭해오던 중간평가정국이 이제 겨우 한 가닥 방향을 잡아가는 것 같다.
아직 최종적인 결론이 난 것은 아니지만 중간평가는 노태우 대통령의 선거공약인 만큼 반드시 실시돼야 하고 그 방법은 대통령 직선정신에 입각한 국민투표형식이어야 하며 그 성격은 신임과 연계될 수밖에 없다는 선에서 굳어지고 있다.
따라서 평가문제를 놓고 그동안 갈팡질팡하던 여야가 불행한 일이긴 하지만 숙명적인 이 전」을 피할 수 없게된 셈이다.
정부와 민주당 내에서는 아직도 신임과 연계시키는 문제에 대해 이견이 완전 해소되지 않고 있고 야3당간에도 명백한 입장 정리가 안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의 김용갑 총무처장관의 돌연 사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여권내의 분위기는 신임 연계 폭으로 기울고 있고 야권도 궁극에 가선 총력반대투쟁으로 돌아설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물론 대다수 국민들은 패자도 승자도 모두 상처만 입게 될 여야정면대결에 불안을 느끼고 지금이라도 여야가 정치력을 발휘하여 이 「최악의 상태」만은 피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느낌이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중간평가에 있어서 가장 상책은 국민투표방법은 하지 않는 것이고 설사 투표를 하더라도 공약이행차원의 「순수정책평가」로 하는 것이 중책이며 여야가 정권을 걸고 한판승부를 벌이는 것이 하지 하책이라는 데는 상당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것 같다.
때문에 최근 있었던 노 대통령과 김종필·김대중 총재와의 회담에서 정면대결을 피하고 「단순정책평가」로 하자고 합의한데 대해 환영하는 여론이 많았던 듯싶다.
그러나 이 같은 정책평가합의에 민주당과 재야는 물론 여권내부에서조차 강한 반발이 일고있고 평민·공화당이 제시한 전직 대통령의 국회증언 등 5공 정산이란 전제조건도 실현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 이제는 여야가 떳떳이 맞붙는 게 오히려 국민투표후의 국면전환가능성이라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대통령은 단순정책평가라고 강조하고 실제 밑에서는 신임을 건 투표라며 찬성을 독려한다거나 야당도 표면적으로는 반대투쟁을 않겠다고 해놓고 내면적으론 거부운동을 전개한다면 양측이 모두 국민을 속이는 결과가 될 것이다.
따라서 노 대통령도 이제는 국민투표에 신임을 걸겠다고 떳떳하게 표명하고 야당도 명백한 입장을 표명하는게 좋겠다.
그래야만 투표결과에 대한 책임이 명백히 가려지고 투표 후유증도 상당히 축소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여야 간의 정면대결이 어차피 불가피하게된 상황이고 보면 이제 남은 것은 투표를 얼마나 공정하게 실시하고 중간평가 이후의 정국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의 문제라 하겠다.
중간평가에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음에도 끝난 후에 신임연계가 위헌이라느니, 투개표 과정에서 부정이 있었다느니, 금전·타락투표였다느니 식의 새로운 쟁점들이 ??출한다면 국민투표는 오히려 실시하지 않는 것만도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선거사상 한번도 패자가 승자에게 깨끗이 승복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이번 국민투표 결과에 대해 관계 당사자들이 이를 솔직히 인정할 수 있을지 우려된다.
투표가 끝난 후에도 현재와 같은 혼란과 소요가 계속된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75년 2월 실시된 유신헌법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연계투표이후 불과 하루도 못돼 개헌논쟁이 재연됐던 사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결국 2·12 투표 후 두 달도 못돼 고대에 휴교령을 내린 긴급조치 7호가 선포됐고 3개월도 안 돼 유신헌법에 대한 비방조차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가 발동돼 국민투표 약효는 3개월도 못 가고 말았다.
75년과 현재의 상황을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번에도 노 정권의 퇴진을 들고 나온 세력들이 설사 투표에 졌다고 해서 순순히 승복할 것으로 보기는 어려운 면도 없지 않다.
88서울올림픽의 성공이 국정감사·청문회 등의 돌풍에 휘말려 불과 며칠사이에 봄눈 녹듯 사라져 버리듯이 국민투표 이후에도 이 같은 상황이 재현된다면 심각한 국면에 처하게 될 것이다.
때문에 정부·여당은 단순히 투표에 이길 것만 생각할게 아니라 신임을 받을 경우 남은 4년 간의 국정운영을 어떻게 펴나갈지를 미리 짜놓아야 한다.
국민투표에 이겼다고 해서 만사가 자동적으로 풀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국민투표가 모든 것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여의주가 될 수는 결코 없으며 여소 야대의 정국구도, 3김의 대권경쟁, 재야의 투쟁 등에 큰 변화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다만 36·7%의 대통령이 50%이상의 대통령이 된다면 정통성의 강화에 따른 자신감에서 그에 상응한 정국대처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향후4년을 담보로 눈치를 살펴오던 공무원들이 보다 충성심을 발휘하게되고 해이해진 여권의 구심능력이 되살아날 정도일 것이다.
따라서 정부·여당은 밀어붙이기 식의 성급한 수단보다는 보다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청사진을 마련해 지금의 지루하고 답답한 국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시도해봐야 할 것이다. 과감한 당정개편·내각제개헌·거국적 정치체제구축 등을 한번쯤 검토해 볼만하다는 지적도 있다.
반면 야당도 불신임투쟁이후의 수권대안에 대한 구체안을 제시함으로써 국민들이 불안에서 벗어나 마음놓고 투표할 수 있는 분위기라도 조성해야 할 것이다.
페어 플레이 속에서 국민투표를 마칠 수 있도록 여야 간, 그리고 야당간의 대화가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고흥길<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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