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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축구 정치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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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원둘레 69cm, 무게 441g. 월드컵 공인 축구공이다. 이를 둘러싼 열정과 분노는 눈덩이와 같다. 구를수록 커진다. 축구가 전쟁과 평화, 정치와 떨어질 수 없는 이유다.

축구는 지도자를 만들고 내쫓는다. 1회 우루과이 월드컵(1930년). 결승에서 우루과이에 진 아르헨티나의 이리고옌 대통령은 군부 쿠데타로 실각했다. 94년 이탈리아. 미디어 황제 베를루스코니를 총리로 만든 모태는 명문 구단 AC밀란이다. 그는 구단주다. 그가 만든 당 이름은 '전진 이탈리아'. 우리의 '대~한민국'에 해당하는 이탈리아 축구 응원 구호다. 89년 브라질 최초의 민선 대통령에 뽑힌 멜로는 구단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축구를 무시한 독재자는 드물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축구를 정권의 선전 도구로 삼은 원조다. 2회 월드컵 유치는 그 일환. 메인 스타디움 이름도 'PNP(국가파시스트당)'로 지었다. 2, 3회 월드컵을 연거푸 석권한 대표팀은 '조국에 봉사하는 전사들'. 그는 대표팀과의 이벤트를 통해 국민을 하나로 묶었다.

스탈린 체제의 소련도 오십보백보. 헝가리에선 당시 소련과의 경기를 돌이키는 조크가 유행했다. 헝가리가 소련을 물리쳤을 때 크렘린은 짤막한 전문을 보낸다. '당신의 승리를 축하하오. 석유와 가스 공급은 중단될 것이오'라는. 당시는 소련 비밀경찰 총수이자 구단 회장이던 베리야가 라이벌 구단 선수들을 시베리아로 유배 보낼 때다.

그러나 공은 둥글다. 부메랑이 될 수 있다.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괴벨스. 그에게 축구는 나치의 선전장이던 베를린 올림픽(36년)과 딴판이었다. 41년 히틀러 생일에 치러진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독일이 지자 이렇게 지시한다. "결과가 의심스러운 모든 스포츠 교환 경기는 안 된다"고. 전체주의 체제에서 패배는 원천봉쇄 대상이다.

월드컵은 내셔널리즘의 충돌 무대다. 86년 멕시코 월드컵.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의 핸들링 골로 잉글랜드를 격파했다. 그래놓고 이 축구 영웅은 '신의 손'이라고 미화했다. 그에게 잉글랜드전은 82년 양국 간 포클랜드전쟁의 복수전이었다. 식민지와 그 종주국. 침략국과 피침국. '전쟁 게임'은 널려 있다.

독일 월드컵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를 부정한 이란 대통령의 참관 선언, 네오나치스트 집회 계획으로 장외가 시끄럽다. 지구촌 최대의 제전(祭典)이 정치의 굴레를 벗어나는 답은 대회 슬로건에 있다. '친구를 만들 시간'이다.

오영환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