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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국 IT 대표선수 화웨이부터 잡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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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이 미국과 중국 간 무역전쟁에 멍들고 있다. 특히 중국의 ‘기술 굴기(崛起)’를 꺾기 위한 미국 공습이 거세다. 미국 IT 회사들은 글로벌 교역 둔화 여파를 맞고 있다. 자국 이익을 앞세워 펼친 보호무역주의 칼날이 미·중 핵심 기업들에 부메랑처럼 되돌아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무역전쟁 또다른 전선, 기술억제 #“화웨이 통신장비 사용 중단을” #독일·이탈리아·일본 정부 설득 #냉전시대처럼 편가르기 조짐 #트럼프·시진핑 이달말 G20 회동 #“가짜 합의로 시장에 일시적 안도” #전문가 ‘장기적 휴전’엔 비관적

세계 1위 통신장비업체인 화웨이는 미국이 구축 중인 ‘안티 화웨이’ 전선에 가로막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 정부가 독일·이탈리아·일본에서 화웨이 통신 장비 사용 중지를 설득하고 나섰다고 22일(이하 현지시간) 보도했다. 최근 미 관료들이 동맹국인 세 나라 정부 관계자와 통신사 경영진을 폭넓게 접촉한 정황이 포착되면서다.

미 정부와 화웨이의 갈등은 무역전쟁 발발 전인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 의회는 보고서를 내 화웨이 장비가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고 규정했다. 도청이나 해킹 등을 통한 스파이 활동 및 통신 교란 우려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미국은 중국 정부가 사실상 화웨이의 배후에 있다고 의심한다. 화웨이가 비상장 기업인 점, 런정페이(任正非) 화웨이 회장이 인민군 출신인 점 등이 근거다.

미국 측 주장이 아주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 2016년 미국 내 화웨이 스마트폰에서 ‘백도어(backdoor)’가 발견된 적이 있다. 백도어는 인증되지 않은 사용자가 무단으로 시스템에 접근해 메시지, 연락처, 통화기록, 위치정보 등을 알아내는 ‘뒷문’ 통로를 말한다. 당시 화웨이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중국 기업의 실수이지 중국 정부와는 연관이 없다”고 해명했다. 그래도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트럼프 정부는 집권 후 ‘안티 화웨이’ 움직임에 가속 페달을 밟았다. 올 4월 미 연방통신위원회(FCC)는 중국 통신 장비를 쓰는 업체들에 보조금을 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미국 1, 2위 통신사인 AT&T와 버라이즌은 화웨이 스마트폰을 출시하지 않는다. 중국 정부는 화웨이 배후설이 근거 없는 음모라며 반발하지만, 미국은 화웨이 퇴출 프로그램을 동맹국으로 넓혀가고 있다.

WSJ은 미국이 “자국에 화웨이 장비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작전의 전선을 해외로 확장했다”고 전했다. 올 8월 호주 정부는 안보 우려를 이유로 화웨이의 5세대(5G) 통신 장비 공급을 제한했다. 영국도 지난달 화웨이를 포함한 통신 장비 시장 조사에 착수했다. 두 나라 모두 ‘다섯 개의 눈(Five Eyes)’으로 불리는 미국의 1급 동맹국이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미 정부의 이번 독일·이탈리아·일본 접촉은 보다 광범위한 ‘기술 냉전’을 암시한다. 세 나라에는 모두 미군이 주둔해있다. 군사시설에서도 민간 통신망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화웨이 장비로 미군 정보가 흘러가는 걸 원천 봉쇄하겠다는 의도다. 과거 냉전 시대와 같은 글로벌 편 가르기 양상이 나타날 조짐도 보인다. WSJ은 미국이 중국산 장비를 쓰지 않는 국가들에 재정지원을 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무역전쟁이라는 싸움판에서 미국이 ‘안티 화웨이’를 통해 중국의 기술 굴기를 저지하려는 측면도 강하다. 관세 폭탄보다 더 치명적인 기술억제를 통해 중국을 곤경에 빠뜨리겠다는 의도다. WSJ은 “미국의 이번 작전은 미·중 무역 전쟁의 또 다른 전선”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은 2020년으로 다가온 5G 기술 상용화를 앞두고 중국과 알력다툼을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현재 세계 시장 점유율 1위(22%) 통신장비업체인 화웨이가 5G 기술 표준이 되는 걸 막는 게 미국의 진짜 목표라고 본다.

중국 기술 기업을 향한 미국의 칼날은 이미 시퍼렇게 서 있다. 지난달 30일 미 법무부가 중국 푸젠진화(福建晉華) 반도체를 기술탈취 혐의로 기소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푸젠진화는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의 D램 제조·설계 관련 기술을 빼낸 혐의를 받고 있다. 푸젠진화는 억울하다는 입장이지만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이미 중국 남동부에 위치한 생산공장은 가동을 멈췄다. 북미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사실상 주문이 끊기면서다.

익명을 요구한 푸젠진화의 한 엔지니어는 “지방정부 관료들조차 공장의 미래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직 트럼프와 시진핑만이 우리를 구해줄 수 있다”는 푸념이다.

하지만 양국 간 기술 싸움은 정전(停戰)보다 확전(擴戰) 양상이다. 미 상무부 산업보안국(BIS)은 지난 19일 중국을 겨냥해 인공지능(AI) 및 로봇, 양자 컴퓨팅 등 차세대 기술에 대한 수출 규제를 신설하기로 했다. 가오펑(高峰) 중국 상무부 대변인은 이에 대해 “건설적인 조치를 통해 무역 환경을 개선하길 희망한다”고 비판 성명을 냈다.

미·중 무역전쟁에 따른 중국 기술기업의 타격은 글로벌 경기 둔화를 이끄는 촉매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경제 의존도가 높은 국내에서도 우려 목소리가 나온다. 하인환 SK증권 연구원은 “미국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중국의 기술 탈취 관련 부분”이라면서 “중국이 버티지 못하고 양보하는 형태로 미·중 합의가 이뤄질 경우 장기적으로는 글로벌 자산시장에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더 큰 문제는 무역전쟁 여파가 미국 IT기업도 비껴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뉴욕증시 시가총액 1위 기업인 애플은 글로벌 교역 둔화로 인한 판매 부진 늪에 빠졌다. 지난달 고점 대비 시총이 1조 달러 넘게 곤두박질쳤다. 골드만삭스, JP모건 등 주요 투자은행들이 앞다퉈 애플의 목표 주가와 실적 전망치를 하향 조정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오는 30일 열리는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서 만난다. 영국계 금융분석회사 TS 롬바르드의 보 주앙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23일 CNBC 방송에 출연해 “두 정상 만남에 기대가 크지만, 이번 회동에서는 사진 촬영과 가짜 합의(mock deal)가 시장의 일시적 안도만 불러올 것”이라고 분석했다. “양국의 장기적 휴전을 끌어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심새롬 기자 saer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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