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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 한 스푼]쌀 아끼려다 나온 '잡곡 스시'를 아시나요

중앙일보

입력

40대 중반 이상이라면 초등학교 시절, 보리 같은 잡곡을 섞어 밥을 지었는지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도시락을 조사하던 혼식 검사를 기억할 것이다. 당시 권장 혼식률은 30%. 적어도 잡곡을 30% 이상 섞으란 얘기다. 또 매주 수요일은 분식의 날이라고 해서 빵이나 국수 같은 것을 먹도록 장려했다. 모두 귀한 쌀을 아껴보자는 취지였다.

예전에는 귀해서 못 먹었던 쌀, 이젠 입맛 변해 덜 먹어

1973년 혼·분식 특별요리 강습 [연합뉴스]

1973년 혼·분식 특별요리 강습 [연합뉴스]

1969년 1월 정부는 혼분식 장려 정책을 강화하는 행정명령을 고시했다. 음식점들은 반드시 25% 이상의 잡곡이나 면류를 혼합해 팔도록 했고, 수요일과 토요일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아예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게 했다. 이를 위반한 업소에는 엄중한 처벌이 내려졌다.

그러다 보니 식당에는 암행단속반이 들이닥쳐 솥단지를 뒤지는 등 진풍경이 속출했다. 그중 압권은 생선 초밥(스시)에도 잡곡을 넣도록 강제한 것이다. 주요 관광수입원인 일본인 관광객들이 잡곡이 섞인 스시에 기겁하자 관광협회는 1973년 초 보리로 만든 스시를 들고 당시 김보현 농림부 장관을 찾아가 “먹어보라”며 항의하는 소동까지 벌였다.

당시 서울의 한 호텔 일식 코너에서 근무한 이병환씨가 “처음에는 비웃던 일본사람들도 차츰 고개를 숙이더라”며 들려주는 잡곡 스시 제조 이야기. “보리는 식으면 찰기가 없는 데다 조금만 넣어도 검은색이 번져요. 그래서 보리는 조금 넣고 콩ㆍ팥ㆍ차조로 대신했지요. 그런데 차조가 골치예요. 이게 초하고는 안 어울리는 거라. 할 수 없이 미리 초를 손에다 묻혀 차조를 피해 비비느라 손이 벌겋게 헤어지고요. 하루 반 가마를 그렇게 만드니 배겨납니까” (중앙일보 1997년 9월11일자 5면 참고)

보리혼식장려 요리전시회 [중앙포토]

보리혼식장려 요리전시회 [중앙포토]

지금은 쌀을 안 먹어서 쌀이 남아돌지만 40~50년 전 한국은 이처럼 쌀이 모자라 아우성이었다. 이 때문에 정부는 다수확 신품종 쌀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첫 번째가 ‘희농(熙農)1호’다. 중앙정부 요원이 1964년 이집트에서 밀반입한 볍씨다.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국회에서 요원들이 두꺼운 책의 안쪽을 도려낸 뒤 그 속에 볍씨를 채워 외교 행랑 편으로 공수해온 것을 무용담처럼 말했다.

1965년 시험 재배에서 재래종보다 30% 이상 수확률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면서 당시 언론에서는 기적의 볍씨로 소개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희(熙)'자를 따 ‘희농1호’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1967년 일반 농가에 보급해 재배한 결과 씨받이 마저 어려운 흉작에 그쳤다. 때마침 닥친 극심한 가뭄 탓도 있었지만 한국의 기후나 풍토에 맞지 않는다는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쌀의 자급자족을 도운 신품종은 1971년에야 나왔다. 서울대 농대 허문회 교수가 한국ㆍ일본에서 재배하는 ‘자포니카’ 벼와 동남아지역에서 재배하는 다수확 종인 ‘인디카’ 벼를 다원 교배해 만든 'IR667'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에게는 통일벼라는 이름으로 친숙한 쌀이다. 통일벼는 타 품종보다 생산성이 30%가량 높았고, 정부의 적극적인 보급으로 한국은 1977년 쌀을 자급할 수 있게 됐다. 정부는 허 교수의 업적을 기려 50원짜리 동전 뒷면에 통일벼를 새겨넣었다.

통일벼 수확당시의 모습 [중앙포토]

통일벼 수확당시의 모습 [중앙포토]

그러나 통일벼는 수량은 많지만 쌀의 품질과 밥맛이 좋지 않았다. 특히 인디카 벼의 특징을 많이 가져온 탓에 저온에 약했다. 1972년에는 닥친 냉해 때문에 대흉작을 거뒀고, 1978년 도열병과 1980년 냉해를 겪으면서 약점을 드러냈다. 결국 정부가 1992년 쌀 수매 대상에서 통일벼를 제외하면서 자취를 감췄다.

대신 허 교수의 육종 기술을 이어받은 제자들의 활약으로 쌀 품종 개량이 이어지고, 비료와 농업기술의 발달로 80년대부터 질 좋고 맛있는 쌀 생산이 가능해졌다.

이처럼 없어서 못 먹었던 쌀이었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덜 먹어서 남아도는 신세가 됐다. 한국의 경제성장과 국제화로 식생활이 서구화하면서 한국인의 쌀 소비량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1970년 1인당 평균 136.4㎏에 달했던 쌀 소비량은 2017년 61.8㎏으로 반토막도 안 된다. 밥 한 공기가 200g인 점을 감안하면 국민 1인당 하루에 쌀밥을 한 공기 반 먹는 셈이다.

대신 육류 소비는 같은 기간 5.2㎏에서 49.1㎏으로 9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우유 소비는 약 50배, 계란 소비도 3배로 늘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특히 소고기의 경우 소비량이 1970년 한ㆍ일간 격차는 한국이 0.5㎏, 일본이 1.1㎏으로 일본이 한국의 2배였으나 1996년 7㎏ 수준에서 양국 간 격차가 없어지고, 2015년에는 한국이 10.9㎏ 일본이 5.8㎏으로 한국이 일본의 약 2배를 소비하고 있다.

축산물 소비량 증가는 신장 등 체격 향상으로 이어졌다. 20세 기준 성인 키는 지난 55년간 8.5㎝가 커졌다. 남자의 경우 1960년 166.4㎝에서 2015년 174.9㎝로 커졌고, 같은 기간 여자는 153.8㎝에서 162.3㎝로 각각 8.5㎝ 커졌다. (농협 축산경제리서치센터)

이처럼 ‘먹는 즐거움’을 누리게 됐지만, 부작용도 있다. 동물성 식품과 지방의 과다 소비로 비만ㆍ고혈압 등 성인병 발병률이 높아져 식생활의 불균형을 이젠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국민의 식탁이 변하면서 쌀 생산량도 줄어들고 있다. 지난 1965년 350만t이던 쌀 생산량은 1977년ㆍ88년 600만t을 넘기기도 했다. 그러나 2004년을 마지막으로 500만t대를 기록한 뒤 계속 감소세를 보이더니 올해는 387만t으로 내려앉았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이 같은 현상은 재배 면적이 감소한 탓이다. 농지가 다른 용도로 개발되고 있는 데다 정부가 쌀 수급 관리를 위해 농지에 벼 대신 콩·옥수수 등 밭작물을 재배하도록 독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쌀은 수요보다 공급이 많은 상황이다. 이에 정부는 남아도는 생산량을 줄여 수요와 균형점을 맞추고 농가 소득 불균형을 줄이기 위해 쌀 직불제(국가 재정으로 농가에 직접 소득 보조를 하는 제도) 개편을 추진 중이다.

이개호 농식품부 장관은 최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직불금을 재배작물, 생산 및 가격과 관계없이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꿀 생각”이라고 말했다.

세종=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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