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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재판이 사법농단 안 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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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임장혁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임장혁 중앙SUNDAY 차장

임장혁 중앙SUNDAY 차장

“관계 재판장들과의 협의를 거쳐… 일부 재판부를 배제하고, 무작위 전산 배당했다.”

지난 15일 법원이 속칭 ‘사법농단’ 의혹의 키맨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재판을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재판장 윤종섭)에 배당하면서 덧붙인 배경 설명이다. 형사36부는 지난 9일 느닷없이 새로 생긴 합의부 3개 중 하나다.

이 설명에서 ‘무작위 전산 배당’이라는 말과 ‘협의’ ‘배제’ 등의 표현은 형용 모순을 이룬다. 이런저런 고려 끝에 남긴 소수의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한 것을 ‘무작위’라고 할 수 있을까. 특정 사건을 특정 재판부에 맡겼다고 보는 게 사실에 가깝다. 재판부 신설은 여당이 “부패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합의부 7곳 중 5곳의 재판장이 사법농단 조사 대상이거나 피해자라서 재판의 공정성을 장담할 수 없다”며 특별재판부 입법을 추진하자 법원이 꺼낸 방어책이었기 때문이다. 법원 인사에 외부의 힘이 끼어드는 것만은 막겠다는 판사들의 뒤틀린 심사가 작용한 결과다. 덕분에 재판이 ‘제 식구 감싸기’로 끝날 우려는 가라앉았지만 역으로 ‘남의 식구 죽이기’가 될 거라는 걱정은 커졌다.

임 전 차장 등의 핵심 공소사실 중 하나는 진보 성향 법관 모임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활동을 방해하거나 회원들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줬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피해자’였던 이 단체는 지난 1년 새 ‘권력집단’으로 급부상했다. ‘양승태 대법원’에 대한 의혹 제기와 조사를 주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사법 권력을 접수한 결과다. 지난해 5월 이 단체 간사였던 김형연 부장판사가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발탁된 이래 김명수 대법원장, 김상환 대법관, 김기영 헌법재판관, 민중기 중앙지법원장 등 고위직을 배출하며 인사·정책·감사 등 사법행정의 요직을 장악했다. 김 대법원장과 민 중앙지법원장이 의사결정 책임자로서 신설한 형사36부에는 이 단체 핵심 멤버가 배석 판사로 있다. 피해자가 자신을 가해자로 지목한 사람의 죄를 묻는 재판이 공정할 수 있을까.

더 큰 문제는 재판장, 다른 배석 판사, 앞으로 관련 재판을 맡을 재판부 구성원이 피고인과 얼마나 정치적 적대관계에 있는지 검증할 길이 막혀 있다는 데 있다. 재판에 앞서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산하 ‘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소모임’ 회원 명단이 공개돼야 한다. 배당에 앞서 진행한 재판장 회의 내용과 일부 재판부 배제 사유도 공개해야 한다. 명단 공개 없이는 재배당이나 특별재판부 설치 등 어떤 길도 대안이 되기 어렵다. 사법농단 재판이 또 하나의 사법농단 의혹으로 남지 않으려면 투명성 확보를 위한 스스로의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한때 법원 내 권력집단으로 주목 받던 우리법연구회와 민사판례연구회는 2010년 회원 명단을 공개했다.

임장혁 중앙SUNDAY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