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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스러웠던 조성진 vs 거대한 텍스트의 트리포노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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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이 진정한 글로벌 뮤직의 대표주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확인했다. 지난 15일과 16일 러시아와 독일의 대표적 작곡가들의 걸작을 무대에 올린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관현악단 산타체칠리아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안토니오 파파노 지휘)은 지난 세기부터 칭송 받아온 고전음악의 걸작들이 국경과 시대를 초월해 이해와 공감을 빚어낼 수 있다는 멋진 예를 보여준 자리였다. 공연의 꽃인 협연자의 자리에 오른 두 명의 피아노 스타들은 절정의 오른 기량을 뽐냄과 동시에 자기 색채가 뚜렷한 해석을 통해 작품들이 과거의 유산이 아닌 ‘오늘의 히트곡’ 이라는 것을 증명해 냈다. 15일 협연한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27,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와 16일 조성진(24, 2015년 쇼팽 콩쿠르 우승)이다.

15,16일 릴레이 협연한 두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 김주영이 본 피아노 스타들의 색채

1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협주곡 3번을 연주한 피아니스트 조성진. [사진 크레디아]

1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협주곡 3번을 연주한 피아니스트 조성진. [사진 크레디아]

피아노 협주곡을 통털어 가장 어려운 기교와 지치지 않는 힘을 필요로 해 ‘코끼리’ 혹은 ‘공룡’ 에 비유되는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3번 d단조는 귀를 통해 따라가기 복잡한 텍스트와 구성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음반과 영화 등을 통해 팬이 많은 인기곡이다.

따라서 귀에 익숙한 음향과 밸런스를 기대했던 청중들에게 다닐 트리포노프의 해석은 처음부터 놀라움으로 다가왔을지 모른다. 작곡가 특유의 서정적인 선율선이나 외형의 윤곽을 강조하는 대신 내성의 변화무쌍한 흐름을 나타내어 그 안에서 발생한 숨은 에너지를 오케스트라 속 다양한 앙상블과 공유하는 모습은 창의성이 느껴지는 신선한 아이디어였다. 그 결과 피아노의 존재감은 오히려 더욱 확대되었는데, 솔로 악기를 다루는 주인공으로서 홀로 돋보이는 것이 아니라 악곡 전체를 이끌어 가는 리더이자 거대한 합주의 일원으로 비춰지는 모습에 호감이 갔다. 화려하게 빛나지만 홀로 떨어져 빛나는 섬이 아니라 관현악을 함께 아우르며 거대한 텍스트를 바라보는 혜안은 자신의 협주곡을 만들 정도의 작곡 실력과 거기에 따른 통찰력에서 나왔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트리포노프의 무대가 주는 매력은 무아지경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무서운 집중력이다. 온 몸을 던져가며 건반을 정복해가는 뜨거운 비르투오소의 면모는 1악장의 장대한 카덴차와 3악장의 변화무쌍한 경과부에서 멋지게 나타났으며, 특유의 카리스마 역시 부족함이 없었다.

1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와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을 연주한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 [사진 크레디아]

1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와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을 연주한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 [사진 크레디아]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 [사진 유니버설 뮤직]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 [사진 유니버설 뮤직]

최근 선보인 라흐마니노프 앨범은 ‘데스티네이션’ (목적지) 이라는 제목이 알려주듯 미국에서 교육받고 성장한 러시아인 트리포노프의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녹음이다. 관현악과 주고받음이 무척 까다로운 피아노 협주곡 4번이 앨범의 핵심인데, 물기를 머금은 톤과 깔끔한 뉘앙스 처리가 현대적인 매력을 선사하는 호연이다. 또한 이번 공연에서도 보였듯 군림하기만 하는 솔리스트가 아닌, 총체적 사운드를 구성하는 앙상블의 한 사람으로 ‘녹아드는’ 표현에도 능한 모습이 흐뭇함을 자아낸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사진 유니버설 뮤직]

피아니스트 조성진. [사진 유니버설 뮤직]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은 37이라는 작품번호가 말해주듯 작곡가의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규정짓는 걸작이다. 따라서 연주자의 해석에 따라 작곡가의 야심 넘치는 초기작이 될 수도, 혹은 중기의 원숙함이 드러날 수도 있는 난곡이다. 연주 전 내게 가장 큰 관심거리였던 조성진의 선택은 우아함과 당당함이 전면에 나서는 성숙미, 즉 중기의 모습이 두드러진 해석으로 비쳐졌다. 악성의 작품은 어느 곡이나 자신감에 차 있지만 베토벤이 사랑했던 조성인 c 단조의 작품은 더욱 특별한 존재감을 지니는데, 넉넉한 템포 감각 속에 숨어있는 품격은 매우 고급스럽고 풍성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번 연주에서는 특히 레가토의 표현이 아름다웠다. 작은 프레이즈에서도 평범한 나열보다는 각자의 음에 다른 뉘앙스를 부여하는 노력이 두드러졌으며, 부분적인 표현이 합을 이뤄 균형있는 논리로 발전되는 모습에서 고전파 작품 해석에 대한 다각도의 고찰이 선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30대 초반 베토벤이 지닌 열정과 비장미를 현명한 절제와 예민한 감각으로 다스리는 자세도 훌륭했지만, 남성미가 필요한 부분에서는 연주자가 지닌 명인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작품 발표 당시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기교가 나타나 있는 1악장의 카덴차를 조성진은 자유로운 상상력이 지배하는 환상곡적인 성격으로 꾸며 내놓았는데, 투명함이 느껴질 정도로 맑고 밝게 설정한 음향이 인상적이었다. 아울러 피날레인 3악장에서는 감성의 적절한 노출을 통해 작품이 지나친 무게감을 갖지 않도록 조절하며 세련된 마무리를 보였다.

따끈한 신보로 나온 조성진의 모차르트 음반 중 단연 눈에 띄는 곡은 모차르트 협주곡 중 베토벤에 근접해 있다는 평가를 받는 협주곡 20번 K466이다. 상쾌한 서정성과 절묘한 루바토, 오케스트라 음향에 녹아들어가는 부드러운 패시지의 조합은 낭만음악을 두루 섭렵한 조성진이 또 한 번의 성장을 만들어 냈다는 표시다. 전곡을 통해 나타나는 크고 작은 카덴차와 2악장에서 자주 등장하는 즉흥적인 느낌의 장식들도 젊음의 매력을 상징하고 있다.

올해는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의 나이 110년을 맞는 해다. 이탈리아에서는 드물게 극장이 아닌 콘서트 홀 전문 연주 단체로 출범한 오케스트라와 안토니오 파파노의 노련한 조력은 스마트함과 센스, 개성을 골고루 갖춰 다양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깊이와 폭으로 압도하는 대신 유려한 음상과 적절하고 아기자기한 아고긱을 통해 입체감있는 선율선과 개운한 뒷맛을 나타내어 두 피아니스트가 펼치는 피아니즘에 이탈리아 오페라의 하이라이트와 같은 짜릿한 순간들을 제공했다.

김주영(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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