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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ily리빙] 탯줄 직접 끊으니 " 나도 아빠 됐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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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임신 36주 때 찍은 공짜 만삭 사진. [쎄븐 스튜디오 제공]

# 순풍 프로젝트

순산 위해 태교.요가.수영…아내는 어느새 '강철 여인'

다행히 아내는 입덧이 없었다. 입덧도 유전인지 모르겠지만, 장모님도 입덧이 없었단다. 임신 20주에 들어서자 아내는 평온을 되찾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아내는 결연한 표정으로 '순풍 프로젝트' 돌입을 선언했다.

아내는 우선 인터넷의 한 임산부 카페에 가입했다. 이어 분유회사.병원.육아용품 업체 등에서 여는 육아교실을 찾아다녔다. 서울 명동.대방동.사당동 등을 거쳐 경기도 광명과 분당까지. 아내는 십여 차례나 육아교실에 참가했다. 강의내용도 솔깃했지만 선물이 쏠쏠했다. 분유.거즈.기저귀.책.CD.양말 등등, 보리 살림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아내는 육아용품 DIY 사이트에서 재료를 사다가 보리 살림을 만들기도 했다. 슬링.기저귀 보관함.양말.모빌 등등, 설명서만 따라하면 되는 일이라 크게 어렵진 않았다. 동네 보건소에도 자주 들렀다. 거기서 아내는 산전체조.모유수유 등을 배웠고 각종 검사도 받았다. 이 모든 정보를 아내는 임산부 카페에서 얻었다고 말했다.

아내는 강철여인으로도 변신했다. 구청 문화센터의 일반 요가교실에 석 달간 다니더니, 백화점 문화센터에선 임산부 요가를 따로 배웠다. 이어 올 3~4월엔 일주일에 세 번씩 임산부 수영교실에 나갔고, 막달엔 산책과 계단 오르기에 집중했다. 집에선 CD를 틀어놓고 임산부 체조를 따라했다. 월드컵 대표팀에 버금가는 체계적인 몸만들기였다.

덩달아 내 일상도 고단해졌다. 막달, 아내와 함께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고 아파트 22층을 올랐다. 구호는 물론 "순풍순풍"이었다. 주말마다 태교 동화를 읽고 자장가를 부르고 '라마즈 호흡법'이란 것도 따라했다. "흡흡하~ 흡흡하~." 지금도 생생하다.

요즘 유행이라는 만삭 사진도 찍어야 했다. "그딴 건 왜 찍느냐?" 저항도 해봤지만 소용 없었다. 아내는 미리 무료 사진촬영권을 얻어 동네 사진관에 예약까지 마친 상태였다. TV 시청권도 극히 제한됐다. WWE 프로레슬링이나 이종격투기 등은 엄격히 금지됐다. WWE 최대 이벤트 '레슬매니어'를 못 본 건 아직도 아쉽다.

# 5월 18일 01시 46분

예정일 3일 전 갑자기 진통이 … 실핏줄까지 터지는 분만의 순간

막달이 되자 아내는 잠을 못 이뤘다. 힘들어하는 게 역력했다. 어느 날 아내는 결혼반지를 빼놓았고, 신발장 구석에 구두를 들여놓았다. 손발이 붓기 시작한 것이다. 옷가지 그득한 여행용 트렁크가 거실로 나왔고, 수첩엔 콜택시 전화번호도 적어놓았다. 아내가 아랫배 움켜쥐고 인상 찡그리는 일도 부쩍 잦아졌다.

5월 17일 아내는 불안하다며 장모님을 불렀고, 오후 9시가 되자 아내는 10분꼴로 인상을 찡그렸다. 병원에 갈까도 했지만, 예정일보다 사흘이나 전이었다. 밤 11시 30분. 아내는 병원에 가자고 했다. 돌아오더라도 가보자고 했다.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병원으로 달려갔다. 12시 30분. 아내를 검사한 간호사는 자궁이 5㎝ 열렸다며 바로 출산준비를 시작했다. 모든 게 갑자기 진행됐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새벽 1시 15분. 분만실엔 힘겨워하는 아내와 아내 머리 곁의 나, 그리고 간호사뿐이었다. 본격적으로 출산이 시작됐다. 아내는 혼신의 힘을 다했다. 얼굴과 목, 등과 팔이 벌겋게 달궈졌다. 실핏줄이 터져나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내의 등을 받쳐주는 것뿐이었다. 의사가 들어오고 간호사 숫자가 늘어났다. 그토록 연습했던 "흡흡하~"를 아내는 잊어 먹었다. 아내는 진땀을 쏟아냈고 나도 진땀이 쏟아졌다. 그리고….

보리가 나타났다. '나타났다'고 해야 맞다. 불쑥, 보리는 모습을 드러냈다. 의사가 아내의 배 위에 보리를 올려놓자, 아내는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보리야! 보리야! 사랑해 보리야!" 당장 기절할 것 같던 아내였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지금도 아내는 답을 못 한다. 그 순간, 아내는 꼭 엄마 같았다. 아빠도 말 좀 하세요, 누군가 그랬던 것도 같다. 하나, 아무 말도 못 했다. 세상은 너무 흐릿했고 온통 흔들렸다. 간호사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노래가 끝나자 탯줄을 끊으라고 했다. 겨우 가위질을 마쳤다.

아침 7시 간호사가 보리를 안고 병실로 들어왔다. 이름표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성별: 여, 신장: 52㎝, 체중: 3㎏, 출생 시각: 5월 18일 오전 1시 46분. 온몸을 꽁꽁 싸맨 보리는 자고 있었다. 세상 모든 평화를 머금은 얼굴이었다. 마냥 신기했다.

# 그리고 …

웃고, 울고, 눈 뜨고 … 날마다 기적
더 큰 기적 '엄마도 곧 부르겠지'

병원에 간 지 2시간도 안 돼 출산한 아내는 병원에서도 순산을 인정받았다. 아내는 운동 덕분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어떻게든 젖을 더 먹이려고 궁리가 한창이다. 잠 못 자는 건 내외가 마찬가지지만 누구도 불평을 하진 않는다.

요즘 집에선 날마다 기적이 일어난다. 웃고, 울고, 새근새근 잠자고, 두 눈을 뜨고, 거창하게 변을 지르고…. 고마운 건, 앞으로 더 많은 기적이 예정돼 있다는 사실이다. 곧 보리는 몸을 뒤집을 것이고, 두 발로 설 것이고, 걸음을 뗄 것이고, 마침내 '엄마'를 부를 것이다. 출산은 이제 막 일어난, 숱한 기적의 시작일 뿐이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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