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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왜 대통령만 바라보나

중앙일보

입력

적어도 앞으로 한달 간은 이라크 파병 문제가 우리 외교의 골칫거리로 남게 될 것 같다. 대통령은 여론을 감안해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국민의 엇갈린 생각을 한쪽으로 정리하는 일이 쉬울 것 같진 않다.

그래서인지 벌써부터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사실 이라크 파병에는 그 어느 때보다 명분이 요구된다. 국가이익이란 실리(實利)도 당연히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명분과 실리의 간극(間隙)은 정치지도력으로 메워진다.

어느덧 외교는 국내정치의 외연(外延)이 돼 버렸다. 나라 밖의 일들이 일반 서민의 일상 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 외교는 더 이상 전문가들의 독점물이 아니다. 또 정보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현실에서 대통령 주변의 참모들만이 둘러앉아 정책을 결정하는 데는 국내 정치적 부담이 크다.

미국 부시 대통령의 대외정책도 다분히 내년 11월 재선을 염두에 둔 손익계산에 따라 결정될 것이란 얘기는 이미 진부하다. 우리 처지도 다를 바 없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盧대통령이 여론을 무시한 채 이라크 파병 입장을 결정할 것이라곤 상상도 못할 일이다.

방미 중이던 한국의 야당 대표가 파병에 대한 미국 측 요구를 간곡히 전달받은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이런 미국식 제스처가 정치인들만을 대상으로 해선 한계가 있다. 그만큼 미국이란 존재는 한국인들의 마음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인기 없는 미국을 한국이라고 보듬어 안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한마디로 무리다. 한국민이 국익을 따져보는 데 어설프고 감정에 쉽게 휘둘린다고 불만일는지 몰라도 미국이란 동맹의 막무가내 행태는 한국인들의 마음을 얻기 힘들다.

그래서 이라크 파병의 명분은 상당 부분 미국이 채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 정부는 실리계산에 기초해 국민을 차분히 설득해야 한다. 지도자들이 여론을 달래고 움직이기보다 널뛰는 국민정서에 편승해 함께 표류한다면 남는 것은 상처받은 국익과 국민의 허탈감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걸핏하면 모든 책임을 대통령에게 미루는 우리의 편의적 타성에는 문제가 있다. 미국은 대외정책 결정에 여론의 무게를 진작에 깨닫고 대민(對民)외교를 정부의 주요 업무에 추가했다.

또 전직 관리와 전문가들이 국제문제에 대한 국민의 이해 증진을 위해 설립한 외교평의회(CFR)는 현안에 대한 국민교육에 진력하고 있다. 한편 의회는 주요 사안에 대한 엇갈린 여론수렴을 위해 시한부로 초당적 위원회를 가동해 정책 건의에 적극 참여한다.

초강국 미국이 그럴진대 국제정세에 따라 나라 운명이 좌우될 수밖에 없는 우리 처지에선 대외문제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와 학습이 더욱 중요하다.

하지만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해 6자회담이 열리고 한.미동맹의 기본틀이 흔들릴 조짐을 보이는 마당에 바깥을 보는 우리 시각이 얼마나 이성적이고, 또 국익에 대한 이해가 투철한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여론의 향방을 가늠하기 어려운 민감한 문제에 대해선 평소에 말 많던 전문가들조차 입을 다문다. 정부도 상황의 심각성과 큰 그림을 국민에게 알리기보다 여론의 눈치보기에 급급하다. 게다가 국내 정쟁으로 날 새우는 정치권의 성숙한 논의는 이미 기대 밖의 일이다.

북핵 문제,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 재배치 등 심각한 외교 난제들은 일반 국민에게조차 전략적 사고를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고 모두가 대통령만 바라보고 있을 순 없다.

때늦은 감은 있으나 정부뿐 아니라 민간전문가 집단과 기관들, 그리고 언론이 함께 나서 국제문제에 대한 일반인들의 의식수준 높이기 작업을 벌여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길정우 통일문화연구소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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