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8. 참 봉사자 닥터 골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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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퀘이커 의료봉사단’일원으로 참 봉사자의 모습을 보여준 닥터 골든(左)과 필자.

전쟁이 끝나자 부산전시연합대는 문을 닫았고, 서울대도 서울로 옮겼다. 나는 학교 근처인 서울 혜화동에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학업 분위기는 조금씩 안정돼 갔고, 나도 의학 공부에 열중할 수 있었다. 여전히 어머니는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해 주셨다. 언니를 통해 쌀과 학비.용돈을 지원했다.

당시 가세는 기울고 있었다. 전쟁통에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내색조차 하지 않으셨다. 나는 최대한 지출을 줄이기 위해 방학이면 고향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인체의 뼈 구조를 공부하기 위해 나는 항상 가방에 사람의 뼈를 넣고 다녔다. 기름기가 잔뜩 묻어 있는 뼈는 고약한 냄새까지 풍겼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종일 두개골을 만지고, 척추뼈를 실로 꿰어 순서와 기능을 외웠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인골(人骨)을 마을로 가져와 부정탔다"고 동네 사람들이 집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동네 망해 먹을라구 작정을 혔구먼. 뭔 일이 생기면 어떻게 책임질 것이오?" 나를 중학교에 보내고 대학까지, 그것도 의과대학에 보낸 것조차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었으니 얼마나 못마땅했을까.

할머니도 불호령을 내리셨다.

"우리 집에 송장 뼈가 있다고? 야가 참말로 미쳤능갑다. 당장 내다버리지 못할까. 그렁게 가시내들은 공부를 갈치는 것이 아니란 말이여."

하지만 이를 막은 것은 어머니였다. "사람 몸을 알아야 제대로 치료를 하죠"라며.

어머니의 든든한 후원으로 의대를 졸업하고 1957년 군산도립병원에서 수련 생활을 시작했다. 내 고향인데다 외국인 의료진이 파견 나와 있어 그곳을 택했다. 당시 군산도립병원에서는 '퀘이커 의료봉사단' 소속 수십 명이 진료를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영국인 의사 골든을 만났고, 그는 훗날 내 의사 생활의 이정표가 될 만한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줬다.

폐렴 환자로 기억된다. 그는 입과 코에서 피고름이 계속 흘러 캑캑거리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응급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석션(흡입관)이 눈에 띄지 않았다. 보다 못한 의사 골든이 입으로 환자의 피고름을 빨아내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옆에서 지켜보는 것조차 힘들 정도의 큰 충격이었다. 상상도 못할 장면에서 나는 하얀 가운을 입은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진정한 봉사자'가 무엇인지 그는 나에게 행동으로 가르쳐주고 있었다.

이듬해 퀘이커 봉사단은 군산도립병원을 떠났다. 나도 이곳에서 수련 생활을 더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골든은 서울적십자병원을 소개해줬다. 나는 그곳에서 수련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당시 서울적십자병원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수련의 제도(인턴.레지던트)를 시행하면서 월급도 줬다.

수련의를 마칠 즈음 선진 의학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가야할 때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논 한 필지 값과 맞먹는 미국행 비행기삯조차 내겐 없었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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