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개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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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산 가까이에는 제가 있어 저수하고, 들 가까이에는 보를 두어 인수하고, 바다 가까이에는 언을 두어 방수하니 제·보·언 세 가지는 수공을 일으키고 한재에 대비하는 것이다.』(『정조실록』 권50)
조선 중기의 수리정책을 단적으로 정형화시킨 기록이다. 설명을 보태면 제방이란 계곡을 막아 계곡물을 농사에 이용하는 방식이고, 보는 천방과 같은 의미로 하천수를 막아 관개수로 활용하는 방안이다.
농업이 최대의 생산수단이었던 조선조에 있어 이러한 수리기술의 개발은 곧 오늘의 첨단기술 못지 않게 중요한 의미를 갖게된다. 수리가 곧 생산증대였으니 이 수리 세 가지를 총괄했던 제언사의 위세 또한 대단했다.
제언사의 형식상 임무는 제방과 천방의 축조·보수를 감독하는 일이어서 오늘의 농지개량조합(농개조)과 같은 기관이지만사실상 중요 임무는 둔전의 확보였다고 한다. 천방을 쌓고 저수지를 새롭게 만듦에 따라 새로운 논밭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이 논밭을 둔전이라는 국유지로 삼고 인근 농민이 경작해서 그 절반의 수확을 국가에 바치게 했다. 제언사의 임무가 점차 제방의 점검이나 수리의 개축은 뒷전으로 밀러나고 농민으로부터 얼마만큼의 세금을 거두어들이느냐로 바뀌어지게 되었다.
제언사의 횡포가 문제되자 성종 때 그 임무를 관찰사가 겸임하게 하지만 조선 후기에 내려오면서 민란이 더윽 격화되는 이유 중 하나로 이 수세의 영향이 크게 한 몫 하게 된다. 아무리 좋은 뜻, 훌륭한 아이디어로 시작된 제도라 해도 그를 관장하고 운영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악법이 되고 탄핵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농민들의 수리시설을 관장하고 농민들의 이익을 대변해야할 농개조의 조합장 자리가 퇴직 관리들의 노후 직장 대물림으로 굳어져 버린다면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월급에 판공비까지 넣어 승용차나 몰고 다니며 농민의 아픔과 어려움을 나누자고 해봤자 말이 통할리 없다.
수세의 경감보다 시금한 문제는 농개조가 애초의 뜻대로 농민의 편의를 돕는, 농민을 위한 기관으로 체질개선되어야 한다는데 있다. 잿밥에 눈 어두웠던 제언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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