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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 없이는 못 삽니다” 배우 신성일이 남긴 명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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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청춘' 등 여러 영화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 신성일과 엄앵란. [중앙포토]

'맨발의 청춘' 등 여러 영화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 신성일과 엄앵란. [중앙포토]

“『아흔 살에 애인만 넷』이라는 책 보셨나요. 내가 그 책의 저자 마르셀 마티오처럼 90세에 애인 넷 갖는 게 목표는 아니지만, 자기 관리만 잘하면 비슷할 수도 있을 겁니다. 나는 사랑 없이는 못 삽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어요.”

7년 전 중앙일보에서 ‘남기고 싶은 이야기-청춘은 맨발이다’(2011년 4~11월) 시리즈 연재를 시작할 때 배우 신성일이 한 말이다. 4일 81세로 세상을 떠난 신성일은 1964년 배우 엄앵란과 결혼 후 55년 동안 따로 또 같이 살아오면서 “우리는 사랑하는 부부 이전에 동지” 등 숱한 명언을 남겼다.

엄앵란이 4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 신성일의 빈소를 지키고 있다. [뉴스1]

엄앵란이 4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 신성일의 빈소를 지키고 있다. [뉴스1]

이들 부부의 삶은 한국 영화의 황금기와도 맞닿아있다. 신성일은 1959년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름에 전속 배우로 발탁돼 이듬해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이후 출연작 541편 중 507편에서 주연을 맡았다. ‘로맨스 빠빠’에서 처음 호흡을 맞춘 엄앵란은 57년 ‘단종애사’로 데뷔해 이미 청춘스타의 반열에 오른 상황이었다.
‘청춘은 맨발이다’에서 이들의 영화 같은 삶을 가능하게 해준 주요 발언을 뽑아봤다. 연재 타이틀은 대표작 ‘맨발의 청춘’(1964)에서 따온 말로 젊은이에게는 희망을, 중ㆍ장년에게는 활력을 주고자 하는 바람을 담았다. 그 해 12월 문학세계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신성일 '남기고 싶은 이야기'

너 노래 잘한다. 하지만 난 너보다 잘생겼다.

김한용 사진집『꿈의 공장』에 담긴 신성일의 모습. [중앙포토]

김한용 사진집『꿈의 공장』에 담긴 신성일의 모습. [중앙포토]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상경한 신성일은 청계천 판자촌을 시작으로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어린 시절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대에 진학해 판검사가 되길 꿈꿨지만, 집안 사정이 갑자기 기울면서 학업에 집중할 수 없었던 그다. 서울에서 호떡 장사를 시작했지만 파리만 날려 석 달 만에 장사를 접은 그는 충무로에서 만난 고교동창 때문에 절치부심한다. 3년을 같은 반에서 공부하고 똑같이 집안이 망했는데 가수로 성공해 자신을 본체만체하는 친구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다짐한다.

2011년 7개월간 본지 연재 ‘청춘은 맨발이다’ #1960년 데뷔작 ‘로맨스 빠빠’서 만난 엄앵란과 #연애부터 결혼생활까지 숨은 이야기 공개 화제 #한국 영화사 톱스타 커플 “부부 이전에 동지”

내가 그 자리에서 했던 생각은 단 한 가지였다. ‘그래, 너 노래 잘한다. 하지만 난 너보다 잘생겼다는 소리 듣는다. 두고 보자.’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처럼 정신이 나간 채 충무로 3가 중부 경찰서 쪽으로 발길을 되돌렸다. 어디로 걷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 발걸음은 새문안교회를 등지고 골목길로 들어가고 있었다. 처음 정신을 차린 곳에서 눈을 들었다. 오른쪽을 보니 ‘한국배우전문학원’이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목표를 둔 건 아니었지만 뭔가 되어야만 할 것 같았다. 묘한 힘에 이끌려 1층 문을 열었다.  

신성일, 신필름과 운명적 만남

내 발연기에 가장 짜증낸 사람이 엄앵란

1960년 신성일의 데뷔작 '로맨스 빠빠'.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1960년 신성일의 데뷔작 '로맨스 빠빠'.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그렇게 한국배우전문학원 문을 열고 들어갔던 신성일은 신필름 오디션 현장에서 눈에 띄어 전속 배우가 된다. ‘뭔가 자존심이 상해’ 원서를 넣지 않았지만 현장에 구경갔다가 이형표 기술감독의 눈에 띈 것이 발탁으로 이어졌다. 신상옥 감독은 본명 강신영 대신 ‘뉴 스타 넘버 원’이란 뜻으로 ‘신성일(申星一)’이란 예명을 선사했다. 5081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신인 배우 모집에 뽑힌 것이다. 첫 작품 ‘로맨스 빠빠’에서 엄앵란을 처음 만난 당시를 신성일은 이렇게 회고했다.

데뷔작에서 드러난 내 연기 실력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시쳇말로 ‘발연기’인데 가장 짜증 냈던 사람이 지금의 아내인 엄앵란이었다. 그 모든 과정이 훗날 뼈가 되고, 살이 됐다.

이 영화는 엄앵란과 처음 연기하는 계기가 됐다. 나는 연기를 잘 못 하는 탓에 점점 주눅이 들었다. 엄앵란은 57년 ‘단종애사’로 데뷔한 이후 청춘스타로 떠올랐고, 나와는 비교가 안 되는 위치에 있었다. 여동생 역인 엄앵란은 나와 엮이는 장면만 되면 쭈뼛거렸다. 같이 연기하기 싫다는 짜증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신성일, 절치부심의 시간

나의 열정은 베수비오 화산처럼 폭발했다

1962년 이민자와 호흡을 맞춘 '아낌없이 주련다'. [중앙포토]

1962년 이민자와 호흡을 맞춘 '아낌없이 주련다'. [중앙포토]

신필름 입사 이후 밥값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여긴 신성일은 초조했다. 신필름에 걸려 오는 전화를 모두 받으며 영화 담당 기자와 제작사 사람들의 목소리를 익혔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그 중 한 기자가 ‘아낌없이 주련다’ 시나리오를 들고 왔다. 이를 두 번째 기회로 여긴 신성일은 전속 계약 기간 3년이 만료된 신필름에 작별을 고하고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극동흥업으로 향한다.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굿바이 어게인’의 앤서니 퍼킨스를 모델 삼아 연구에 나섰다. 신성일은 사흘 밤을 새워가며 촬영한 당시를 두고 “나의 힘과 열정은 폼페이를 집어삼킨 베수비오 화산처럼 폭발했다”고 말했다.

대본을 읽는 일주일 동안 ‘굿바이 어게인’을 7번 보았다. 남자 주인공인 퍼킨스는 여성적 느낌이 넘치는 섬세한 멜로 연기에 뛰어난 당대 최고의 배우였다. ‘아낌없이 주련다’에서 퍼킨스만한 모델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퍼킨스와 일심동체가 됐다. 퍼킨스의 손동작과 눈 움직임을 보며 나를 대입해 보았다. 또 퍼킨스의 연기를 생각하며 대본에 동작을 다 적어놓았다. 대본을 100번도 더 읽었다. 전체 108신(러닝타임 105분)을 외워버렸다.

신성일, 청춘 스타가 되기까지

눈앞엔 엄앵란의 입술만 보였다…“너 내려”

1963년 영화 '배신'에서 엄앵란과 입맞추고 있는 신성일. 대본에 없던 키스신을 만들었다. [중앙포토]

1963년 영화 '배신'에서 엄앵란과 입맞추고 있는 신성일. 대본에 없던 키스신을 만들었다. [중앙포토]

‘아낌없이 주련다’로 청춘스타 반열에 오른 신성일은 부쩍 엄앵란과 함께 촬영할 기회가 많아졌다. 63년 늦가을 경기도 가평군 청평호에서 영화 ‘배신’ 촬영을 위해 보트에 오르던 그는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정진우 감독이 호수 한가운데 멀리 보트를 띄워놓고 엄앵란과 껴안는 장면을 롱샷으로 찍고 싶다고 주문하자 보트 조종사에게 “너 내려”라고 말한 뒤 직접 보트를 몰고 나갔다. 키스를 하라는 주문은 없었으나 그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내 눈앞엔 엄앵란의 빨간 입술만 보였다. 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오랜만에 엄앵란을 껴안으니 심장이 멎는 듯했다. 엄앵란도 당황한 듯했다.

“미스 엄, 가만 있어 봐.” 이 키스는 연기가 아니었다. 우리의 키스를 방해할만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키스는 오랫동안 계속됐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순간이었다. 정 감독은 우리 커플이 탄생하는 것을 가장 먼저 지켜본 목격자라 할 수 있다.

신성일-엄앵란, 연애의 시작

‘맨발의 청춘’은 스파이 작전으로 탄생했다  

1964년 영화 '맨발의 청춘'에서 연기하고 있는 트위스트 킴과 신성일. [중앙포토]

1964년 영화 '맨발의 청춘'에서 연기하고 있는 트위스트 킴과 신성일. [중앙포토]

64년 출연작 33편 중 23편을 함께 한 두 사람은 함께 ‘맨발의 청춘’ 스파이 작전을 도모했다. ‘청춘교실’로 인연을 맺은 한양영화사 기획실장과 식사 자리에서 일본에서 히트한 작품 이야기를 듣고 극동흥업에 제작을 제안한 것이다. 이미 여러 영화에서 호흡을 맞춘 두 사람은 각 영화사의 분위기를 훤히 꿰뚫고 있었기에 한양영화사보다는 ‘가정교사’를 만든 극동흥업이 더 잘 맞을 것이라 판단했다. 연인 이전에 영화적 동지이자 가능한 계획이었다.

 내 생각을 엄앵란에게 이야기했더니, 그도 같은 의견이었다. 우리는 그 기획을 극동흥업에 넘기기로 했다. ‘맨발의 청춘’이란 기획에 깜짝 놀란 극동흥업의 차태진 사장은 우리 말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곧바로 ‘가정교사’를 각색한 서윤성 작가를 중심으로 대본 입수작업이 이루어졌다. 시나리오는 그 다음 날로 극동흥업에 들어왔다. 일본의 4대 메이저 영화사 중 하나인 니가츠(日活)사 작품이었는데, 서 작가가 일본 라인을 통해 구한 것이었다. 극동흥업은 기획과 동시에 촬영에 들어갔고, 결국 ‘맨발의 청춘’은 64년 초 아카데미극장에 걸렸다.  

대표작 '맨발의 청춘'의 탄생

“미스 엄, 나 떨어져 죽어” 부산에서의 작전

앙드레 김이 만든 예복과 웨딩드레스를 입고 1964년 결혼식(왼쪽)과 2004년 40주년을 맞아 벽옥혼식을 올린 신성일과 엄앵란.[중앙포토]

앙드레 김이 만든 예복과 웨딩드레스를 입고 1964년 결혼식(왼쪽)과 2004년 40주년을 맞아 벽옥혼식을 올린 신성일과 엄앵란.[중앙포토]

두 사람의 관계는 ‘동백아가씨’에서 화룡점정을 찍었다. 64년 여름 3박 4일로 이 영화의 부산 촬영 일정이 잡혔다. 숙소 반도호텔에서의 마지막 밤, 스태프들이 복도에 앉아 싸 온 음식을 나눠 먹고 밤새 고스톱을 칠 기세에 돌입하자 신성일은 욕실 들창을 통해 엄앵란 방에 잠입을 시도했다.

들창을 열고 내려다보니 낭떠러지나 다름없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욕실 밖으로 물이 흐르는 홈통이 지나갔다. 나는 야생동물처럼 민첩하게 창틀을 붙잡고 홈통에 발을 디딘 채 4호실 들창 앞에 이르렀다. 창문을 두드리자 불이 켜졌다. 넉살 좋게 말했다.

“미스 엄, 나 떨어져 죽어.” 깜짝 놀란 엄앵란은 나를 끌어올렸다. 

이들은 그해 11월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성일 엄앵란, 세기의 결혼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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