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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황석영씨 35년만에 베트남 찾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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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소설가 황석영(60)씨가 소설 '무기의 그늘'의 무대가 됐던 베트남을 35년 만에 찾았다. 1967년 늦봄 해병대원으로 베트남에 파병돼 1년여 걸친 복무 기간을 마치고 이듬해 가을 한국으로 돌아온 뒤 처음으로 베트남 땅을 밟은 것이다.

베트남은 황씨에게 하루하루 생존이 문제가 되는 이분법적인 전장(戰場)이 아니었다. 베트남 정부군과 월맹군, 한국군과 미군 등 전쟁 참가 주체에 따라 취하고자 하는 바와 명분이 달랐고, 그결과 참전 양상이 다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 따라서 전장은 각기 다른 욕망이 충돌했던 복마전이자 난장(亂場)같은 곳이었다.

군부대 PX는 죽음의 한복판에서도 위세가 막강했던 욕망의 도가니였다.

황씨는 소설 속에서 PX를 '지친 병사가 피묻은 군표 몇장으로 산업사회가 지어낸 소유의 꿈을 살 수 있는 함석 창고 안의 디즈니랜드, 전쟁의 열도(熱度)에 비례해 흥청거리는 구매력과 경기(景氣)로 열광과 도취에 빠뜨리는 아메리카의 가장 강력한 신형무기'로 표현했다.

때문에 소설은 '동생이 손님을 부르고 아버지가 망을 보고 어머니는 돈을 받고 누나는 몸을 파는' 외국군 주둔지 근처의 베트남인 매음굴 등의 현실에 주목했다.

황씨의 이번 베트남행은 베트남 작가회 초청에 따른 것이다. 베트남 작가회는 암시장을 소재로 한 '무기의 그늘'을 베트남전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조명한 작품으로 평가해 황씨를 초청했다.

뙤약볕이 따갑던 21일 황씨는 소설 속 분신인 상병 안영규의 동선을 되짚으며 암시장을 단속하던 합동 수사대가 자리잡았던 베트남 중부 해안도시 다낭과 거기서 한시간 거리인 호이안 시를 찾았다.

처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던 그는 차량이 다낭과 호이안을 잇는 1번 국도를 달릴 때 눈시울을 적혔다. 황씨는 "30여년 전 이 길을 지날 때면 국도 양편 숲속에 매복해 있던 베트남 해방전선 게릴라들이 수시로 저격해 왔었다"고 소개했다.

다낭 시내 곳곳도 30여년이라는 두터운 망각의 껍질을 뚫고 황씨의 예전 기억을 되살렸다.

"다낭시를 따라 흐르는 강에 붙어 있는 신시장에는 배에서 빼돌린 물건들이 풀려 나왔고 물건들은 구시장으로 전해졌다. 거기는 무기까지 거래되는 곳이었다. 강 건너 자리잡은 미군 기지 주변에도 암시장이 들어섰다. 합동 수사대원들은 미군과 월남군인들이 모이는 뱀부클럽, 암시장의 상인들을 상대로 무기.C레이션(비상식량) 등 민감한 물품들의 거래 동향을 감시했다"고 말했다.

황씨는 특히 "지금은 천푸거리로 변한 과거 도크랍('독립'이라는 의미) 거리 59번가에는 합동조사대 한국군 파견대의 사무소.숙소로 사용됐던 그랜드 호텔이 있었는데, 친구가 된 열살쯤의 베트남 소년과 매일 아침 호텔 마당 농구장에서 농구를 하곤 했다"고 말했다. 황씨는 "그 친구가 살아 있다면 40대 중반이 됐을 것"이라며 "다낭 지역 신문에 광고를 내서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30여년 만에 귀환한 황씨의 심정은 단순한 비감(悲感)만은 아니다. "부끄러운 전쟁이었다. 때문에 적절한 계기 없이는 이곳에 다시 오고 싶지 않았다. 30여년 전과 달라진 모습도 있고 변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집 마당에서 개가 뒹굴고 곡식이 익어가는 지금의 베트남은 무척 평화스럽다. 그 때는 왜 그렇게 싸워야 했는지…."

황씨는 "앞으로는 아시아인으로 살아야 한다. 남북한 문제도 아시아인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큰 이야기'도 덧붙였다. 참전을 통해 '제국주의 미국'의 면모를 깨닫게 됐다는 평소 지론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얘기다.

다낭 방문에 앞서 황씨는 18~19일 하노이시를 찾아 베트남 작가회 회원들을 만났다. 개중에는 최근 한국에서 시집 '겨울 편지'(문학동네)를 번역 출간한 시인 휴틴과 베트남 최고의 소설가 바우닌 등도 있었다.

모임에 참석한 베트남 문인들의 절반 이상은 과거 전쟁에 참가했었다.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예전의 적이 양국의 대표적인 문인이 돼 만난 것이다. 황씨는 "마음으로부터 충심으로 사과합니다. 미안합니다"라고 고개를 숙였고 베트남 문인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한편 영화제작사 사이더스는 '무기의 그늘'을 영화화할 계획이다. 베트남 정부와 협의하기 위해 황씨와 함께 베트남에 온 사이더스 차승재 대표는 "다낭.호이안 등은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60년대를 재현하는데 문제가 없어 보인다"라고 말했다.

다낭(베트남)=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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