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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나무 나無 南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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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추분입니다. 오늘부터 조금씩 밤의 길이가 족제비 꼬리처럼 길어집니다. 비로소 천둥 벼락이 그치게 되고, 겨울잠을 준비하는 벌레들이 흙 창호지를 바르지요. 차츰 땅의 물이 마르면서 귀뚜라미가 울고, 집집마다 쿨럭이는 기침소리.

밤낮의 길이가 같다는 것은 음양의 조화를 뜻하지만, 그만큼 팽팽한 긴장입니다. 차별 없는 등거리 사랑의 팽팽한 긴장, 그 바탕은 바로 참회와 용서지요. 지리산 반달곰과 뱀과 개구리는 여태 먹은 것만으로도 충분해 단식과 묵언정진의 동안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가을은 참회와 용서의 계절이며, 무소유 무집착의 날들입니다.

산중에 사는 큰 기쁨은 자연을 닮아가는 것. 봄이면 내 몸의 잎과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내 몸 그늘 아래 누군가를 쉬게 하고, 가을이면 무성한 잎과 열매를 모두 나누어주는 한 그루 무욕의 나무로 서는 것. 그러나 그게 생각처럼 쉬운 일인지요. 불행하게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들의 기생동물입니다. 상생의 날을 꿈꾸며 주문을 욉니다. 나무, 나無, 南無.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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