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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E] 쌀 개방 압력에 농촌 시름 느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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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중국이나 미국 등 외국 쌀이 밀려들어오면 어떻게 될까.

대다수 농가가 쌀농사를 포기하고 생계를 걱정해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쌀값이 외국보다 4~5배 비싸기 때문이다.

시장개방 때 수입쌀 값이 국산과 비슷해지려면 적어도 4백% 이상의 관세를 물려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속한 세계무역기구(WTO)의 1백48개 회원국 중 상당수가 최고 1백% 넘게 관세를 매기는 데는 반대한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1986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제8차 다자간 무역협상인 우루과이 라운드(UR) 때 쌀시장을 보호하려고 관세화(관세 이외의 수량 제한이나 각종 비관세 조치를 관세로 전환시키는 것) 대신 국내 연간 수요량의 4%를 의무 수입하는 것으로 타결을 봤다.

그 기간이 10년이었는데 내년이면 끝난다. 쌀시장 개방을 놓고 내년 말까진 WTO에서 재협상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쌀농사가 갈림길에 선 것이다.

세계는 지금 모든 시장을 개방하는 추세다. 우리의 쌀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쌀의 관세화가 늦춰졌던 일본.이스라엘.대만 등은 그동안 모두 시장을 열었고,우리와 필리핀만 남았다. 무역으로 먹고 사는 처지에 마냥 시장의 빗장을 걸어잠글 순 없다.

내년에 있을 우리의 쌀 협상 대응 방안의 방향타가 지난 14일(현지 시간)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제5차 WTO 각료회의였다. 그런데 회의에서 2006년부터 들어갈 새로운 세계 무역질서인 뉴라운드(도하 개발 어젠다.DDA) 체제의 세부 협상 원칙을 마련하려 했지만 잘 안돼 쌀 협상 전망이 어렵게 됐다.

정부는 당초 뉴라운드 농업 협상 세부안이 올해 안에 확정되면 이를 근거로 외국의 요구에 맞서 쌀의 관세화와 수입물량 확대를 놓고 실익을 저울질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결렬돼 마땅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채 무역상대국들과 1대1로 마주하게 생겼다.관세나 국내 보조금 등에 관한 협상 세부 원칙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협상의 원칙이 없는 상태에선 힘이 센 나라가 유리하다. 상대는 미국.중국.유럽연합(EU) 등 경제대국들이다. 우리로서는 이들과 힘겨운 줄다리기를 할 수밖에 없다.

내년 재협상에서 우리는 단지 쌀의 의무 수입량을 늘리느냐, 관세를 매기는 조건으로 쌀시장을 개방하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우리 쌀은 생산원가가 높아 외국 쌀과 경쟁이 어렵다.

무역을 통해 경제를 키우고 국민소득을 높여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개방에 따른 희생은 농민들에게만 지울 멍에가 아니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농가소득 비율이 도시가구 대비 94년 99.5%에서 지난해에는 73%로 크게 떨어졌다. 지난 10년 동안 농가 부채도 3.5배로 늘었다.

개방 앞에서 농업이 살아남으려면 경쟁력을 갖추는 길밖에 없다. 그래서 정부는 94년부터 지난해까지 농업부문에 71조8천억원을 쏟아부었지만 경쟁력은 도리어 후퇴했다는 비판이다. 농업시설 투자나 유통개혁 등 경쟁력을 강화하는 구조개선 사업보다는 주로 부채 탕감과 소득을 보전하는데 돈을 썼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늦었지만 정부가 농업 살리기에 나서 품종을 고급화하고 쌀 대신 심을 작물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쌀값이 떨어졌을 때 일정 부분을 보전해주는 소득보전 직불제 등 근본적인 대책과 농촌의 복지.의료.교육에 대한 종합적인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아울러 최선을 다해 후속 협상에 나서는 것도 정부의 몫이다.

이태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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