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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 원폭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수폭의 아버지 텔러와 싸운 이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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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947~66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장을 맡으면서 매주 목요일마다 학술 세미나를 열던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67년) 박사는 내게 은인이다. ‘과학자 윤리’와 ‘핵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신념을 확고하게 심어줬기 때문이다.

정근모, 과학기술이 밥이다 - 제131화(7569) #<21>과학자 윤리 일깨운 목요세미나 #유대인 수재로 이론물리학자로 #미국 원폭 개발 당시 연구소장 #위력보고 놀라 수폭개발은 반대 #공직 못 맡고 하원 소환돼 곤욕 #당시 핵융합 연구소서 일하던 나 #‘핵의 평화적 이용’ 신념을 굳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주 건물인 풀드홀(Fuld Hall).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이 연구소 소장을 맡아 매주 목요일마다 학술 세미나를 열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주 건물인 풀드홀(Fuld Hall).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이 연구소 소장을 맡아 매주 목요일마다 학술 세미나를 열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사실 오펜하이머 박사는 과학윤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이론물리학자로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였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뉴멕시코주의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 소장을 지내면서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이론적 주도자 역할을 했다.

그는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19세기 말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유대인 직물업자였다. 하버드대 화학과를 최우등 졸업하고 독일 괴팅겐대에서 23살 때 이론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 과정 지도교수인 막스 보른(1882~1970년)은 유대인으로 30년대 나치가 집권하면서 프랑크푸르트대 교수에서 쫓겨나자 영국에 망명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 교수로 일하다 54년 노벨 물리학상을 새 조국인 영국에 안겨줬다. 가수와 환경운동가로 유명한 올리비아 뉴튼존의 외할아버지다.

로버트 오펜하이머. [사진 위키피디아]

로버트 오펜하이머. [사진 위키피디아]

원폭 개발자였던 오펜하이머는 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 사막에서 이뤄진 세계 최초의 원폭 폭발 실험인 ‘트리니티 작전’ 현장에서 그 위력을 목격하면서 생각을 바꿨다. 핵무기는 인류 생존을 위협하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래서 냉전이 본격화한 50년 미 정부가 원폭보다 더욱 강력한 수소폭탄을 개발하려 하자 이에 반대했다. 그것이 과학자의 윤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원폭은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처럼 질량수가 큰 원소의 원자핵이 중성자와 충돌해 보다 가벼운 2개의 원자핵으로 쪼개지는 핵분열 반응을 이용한다. 수소폭탄은 핵분열과 반대로 두 개의 원자핵이 부딪혀 더욱 무거운 하나의 원자핵으로 변환하는 핵융합 반응을 활용한다. 핵융합을 일으키려면 엄청난 고압과 고열이 필요한데 이를 얻기 위해 수폭은 원폭을 뇌관으로 쓴다. 수폭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에드워드 텔러.[사진 위키피디아]

에드워드 텔러.[사진 위키피디아]

오펜하이머는 수폭 문제로 동료 물리학자인 에드워드 텔러(1908~2003)와 크게 다퉜다. 텔러 역시 유대인으로 독일에서 연구하다 나치 압박으로 미국으로 탈출했다. 맨해튼 계획에서 활동하고 수폭 개발을 강력히 주장해 ‘수폭의 아버지’로 불렸다. 텔러와 상반된 방식으로 나라에 충성하기로 결심한 오펜하이머는 이 때문에 미 하원의 비미활동위원회(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에 불려가고 공직도 맡지 못하는 등 곤욕을 치렀다. 그런데도 고등연구소의 목요 학술 세미나에는 반드시 참석했다.

이 세미나에 참석하며 오펜하이머의 말과 행동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것은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당시 프린스턴대 핵융합 연구소('프린스턴 플라즈마 물리연구소(PPPL)'라고도 함)에서 핵융합을 연구하던 나는 그와 만나면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신념을 굳히게 됐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황수연 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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