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민족합동 음악축전 9월께 성사-재독음악가 윤이상씨 단독 인터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세계 음악무대에 우뚝 솟아있는 재독음악가 윤이상씨(72)가 오는 3월33년만에 고국을 방문한다. 중앙일보사가 주최하는 「윤이상 음악제」 (3월27∼30일·예술의 전당)를 계기로 이루어지는 오랜만의 고국방문이다.
가난과 병마, 동백림사건에 연루된 옥고 등으로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세계적 거인의 자리에 올라선 그는 「상처 입은 용」으로 곧 잘 비유되기도 한다.
지난18일 서베를린 교외 자택에서 세 자루의 촛불을 새로 밝히고 기자를 맞은 윤씨는 그간의 심경과 고국방문에 거는 기대를 솔직이 펼쳐 보였다.
『나는 이번 한국방문을 내 작품이 금지 곡에서 풀린다든가,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고향 충무시엘 가볼 수 있다거나, 생각하기도 싫은 그 사건(동백림사건)으로부터의 명예회복이라는 차원만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민족합동음악축전」준비를 마무리지어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실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미 40년이 넘도록 분단의 통한 속에 살아온 우리 민족이 서로의 오해와 불신을 씻고 한데 얼싸안는 첫 걸음으로 공동음악회를 여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과연 또 있겠읍니까.』
민족이 하나되기를 갈망하는 예술가의 순수한 애국심과 열정을 아직도 터무니없이 곡해하거나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개인 또는 집단이 있다면 그야말로 민족의 대 반역자라고 거듭 강조했다.
언제부터 「민족합동음악 축전」을 구상하셨읍니까?
▲남·북한의 긴장완화 추세를 예상하면서 약3년전부터 구상했는데 적당한 「때」, 즉 정세변화를 기다렸읍니다.
이 음악축전이 늦어도 오는 9월까지는 꼭 열려야한다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더 이상 지연되면 날씨가 너무 서늘해져서 대규모 야외연주회를 열기 곤란할 테니까요.
이 중요하고도 시급한 민족 대잔치를 또 다시 내년으로 미룰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구체적인 방법이야 물론 이번에 휴전선에도 직접 가보고 결정할 문제겠지만 가급적 좀더 많은 우리 동포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운데 우리들의 절실한 통일의지를 확인한다는 것이기 본 원칙입니다. 정치가들은 잔치 뒷바라지만 해주고 실무는 예술가들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이지요.
(기관지염·심장병·폐기종 등의 지병이 있는 데다 음악가로서 도무지 거절할 수 없는 작곡 위촉이 잇달아 쉴 틈이 없다는 그의 말대로 피로의 기색이 역력한 윤씨는 걷는 것조차 몹시 힘들어하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등 건강이 매우 염려스런 상태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몸이 편찮으셨다면서 어떻게 그토록 왕성한 작품활동을 해오셨읍니까?
▲무엇보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고 애씁니다. 이 나이에 하루 6∼7시간씩 작곡에 몰두하자면 식사조절을 하고, 아침마다 집 지하실의 수영장에서 15분씩 수영하고, 오후엔 잠시 낮잠, 그리고 술·담배를 전혀 안 하는 등 여러모로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읍니다.
아뭏든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 이곳 사람들 누구나 다 가는 휴가 한번 가볼 겨를이 없었읍니다.
(그는 89년 한햇동안만해도 오는10월 서독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세계평화음악제에서 연주될 1시간 짜리 교향곡을 비롯, 네덜란드 실내관현악단·미국 쿠세비츠키재단·독일 브라운슈바이크 오페라 하우스와 라이프치히게반트 하우스 등으로부터 위촉받은 작품들을 완성해야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민족의 통일인 만큼 통일의 꿈을 위한 준비작업에 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고 싶다며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윤씨는 지난 56년 유럽으로 건너온 이래 30여년간 1백여곡에 이르는 오페라·교향곡·협주곡·독주곡 등 음악의 모든 종류와 악기편성을 다룬 작품들을 발표해 현재 5대 유럽 음악가로 꼽히는 등 국제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다. 그의 작품은 1년중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세계 어느 나라에선가 직접 연주되거나 방송되고 있고 그의 자필 악보와 사진이 서독국립박물관에 전시 될 만큼 널리 사랑 받는 현대음악가다.
그의 작품만 수록된 음반만도 30종에 이를 만큼 현대음악가로는 유례없이 많은 앨범이 나와 있다.)
지난 85년 서독 튀빙겐대학은 윤선생님의 「동양음악문화와 서양음악문화의 본질적 특수성을 융합시킴으로써 서로 다른 문화를 (연결한 문화중계적 업적」을 높이 평가하명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는데, 윤선생님은 자신의 음악세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본래 예술이란 자기민족의 전통 속에서 발전하게 마련이지요. 다만 한국음악 그대로는 서양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소화되기 어려우므로 한국음악의 알맹이, 그 철학적·미학적·음색적 요소들을 적절한 방법으로 표현하고자 애썼읍니다.
끊임없이 우리 고전을 연구하고 또 고향에서의 기억들을 더듬어가며…. 사실상 내 작품의 바탕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갔던 어느 절간의 고요와 목탁소리처럼 향에서의 인상깊은 체험들이 깔려 있읍니다. 예술이란 모름지기 그 예술가의 인간성·세계관·생활·개성 등 모든 것의 총체일진대 내가 태어나서 자란 땅을 떠난 내 음악이 존재할 수 있겠읍니까.
그러나 지난 30여 년 간 단 한번도(동백림사건 이래 67∼69년의 투옥기간은 제외)가 보지 못한 조국의 기억을 고스란히 되살리기란 결코 쉽지 않았읍니다. 그럼 한 폭, 도자기 한 점에서도 그 옛날의 아스라한 기억들을 되살리려 안간힘을 썼지요. 이래저래 미음은 늘 고향에가 있는 셈입니다.
(서베를린 교외의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잡은 윤씨의 집은 외견상 전형적인 서독 중상류 층의 개인주택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일단 현관을 들어서고 보면 구석구석에 자리잡은 한국 고서화며 조선식 장롱과 도자기 등이 주인의 조국이 어디인지를 새삼 실감케 한다. 서독정부가 그의 자유로운 음악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를 서독시민으로 받아들였음에도 그의 가슴은 여전히 한국을 향해 열려있음을 웅변하는 듯한 집안 분위기다.)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어차피 예술이란 것이 사회적인 행위인 바에야 예술가는 자신이 호흡하고 있는 시대를 생생한 예술의 정신적 모체로 남아야한다고 믿습니다. 순수예술입네 하며 그 시대상황을 외면하는 것은 오히려 부자연스런 일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순수예술이니 참여예술이니하는 표현은 난 센스입니다. 다만 진실한 예술인지 아닌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제가 지난 80년에 작곡한 교향시곡 『광주여, 영원히』도 정치적 음악이라기보다 저의 내적 신념이 표현된 음악이라는 게 옳겠지요. 저는 모든 예술가들이 양심이라든가 정의감 등 자신의 인격을 예술적으로 표현해야한다고 믿는데, 그건 정치하라는 얘기가 결코 아니란 걸 강조하고 싶습니다.
(음악가이기 전에 양심과 정의감을 굳게 지키는 인간이고 싶다는 윤이상씨. 일제시대의 항일운동, 그리고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외치느라 온몸으로 갖은 역경과 싸워온 그의 한 평생을 다시금 돌이켜보게 했다.)
우리 민족의 통일에 대해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낙관해도 좋다고 봐요. 어느 모로 보든 우리는 독일처럼 동서로 나뉘어 살수 있는 여건이 아닙니다. 게다가 독일국민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간절한 통일염원을 안고 있는데 이것은 통일을 위한 큰 힘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우선 긴장을 화해로 바꾸는 게 급선 무기요. 어쨌든 정신적으로라도 남북분단 이전의 시점에서 다시 출발해 민족으로서의 애정을 가꿔야합니다.
(창밖의 소나무 사이로 달빛이 비치면 지구 저 반대편의 고향 땅이 더욱 사무치게 그리워진다는 한국인 윤이상씨. 그는 어머니가 자신을 잉태했을 때 피투성이가 된 용 한 마리가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지리산 언저리를 맴도는 태몽을 꾸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마침내 민족통일의 그날이 온다면 「상처 입은 용」은 승천하겠지요』라며 촛불을 응시했다.) <서베를린=김경희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