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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포럼

한·미 FTA 계산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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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 와중에 한.미 FTA에 지극한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미국 워싱턴에 원정시위를 계획하고 있는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다. 이들은 정부의 자제 당부와 미국 경찰 당국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전답사까지 마치고 예정대로 백악관 앞 시위를 감행할 태세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는 외롭게(?) 한.미 FTA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호소하는 이들이 있다. '스크린쿼터 사수 영화인대책위원회'소속 영화인들은 4개월째 한.미 FTA를 반대하는 릴레이 1인 시위를 해 오고 있다. 26일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장혜옥 위원장이 '문화침략을 노골화하는 미국 정부를 규탄하고 스크린쿼터 사수를 지원한다'며 여기에 합류했다. 앞으로는 촛불시위도 병행한다고 하니 국민의 관심이 조금 커질지 모르겠다. 농민단체들도 지난해 과격시위 이후 아직은 잠잠하지만 협상이 본격화하면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을 성싶다.

이처럼 한.미 FTA에 대해 일반 국민이 무관심한 반면 특정 이익집단은 첨예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다. 한.미 FTA 체결은 나라 전체로는 분명히 득이 되지만, 그 혜택은 눈에 보이지 않게 국민에게 골고루 돌아간다. 수출기업에 유리하다지만 다 같이 덕보는 마당에 딱히 특정한 기업이나 집단에 이득이 집중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아무도 머리띠 두르고 나설 만큼 절실하지 않다. 반면에 FTA 체결로 기득권을 내줘야 할 입장에선 얘기가 확 달라진다. 당장 내 밥그릇이 줄어들게 생겼으니 사생결단(死生決斷)으로 나오는 것이다.

정부가 대외협상 못지않게 국내 쟁점의 조정과 이해 당사자의 설득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혜택을 보는 일반 국민은 관심이 없고 밥그릇이 걸린 이익집단들의 목소리만 커지니 결국 정부가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자는 공청회마저 반대 세력의 물리적인 저지로 제대로 열리지 못하는데도 정부는 그저 심드렁하다.

그러자 과연 이 정부가 정말 한.미 FTA를 추진할 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평택 대추리 사태에서 보인 것처럼 국가적 과제라고 툭 던져 놓고는 막상 시민단체나 이익집단이 반발하면 나 몰라라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정부가 올인하고 있는 부동산 정책의 절반만이라도 한.미 FTA 추진에 공을 들였다면 사정이 달라졌을 텐데 도대체 그만한 열의를 보이질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미 FTA가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후반 레임덕 현상을 돌파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계산에서 나왔다는 음모론도 제기된다. 임기 내에 협상이 타결되면 큰 업적으로 남을 것이고, 실패하더라도 FTA 반대세력을 새로운 지지층으로 결집시켜 정권 재창출의 기반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사 여부에 관계없이 정치적으로 손해 볼 게 없다는 얘기다. 만일 이런 가정이 사실이라면 한.미 FTA에 대한 정부의 맥빠진 대응이 이해가 된다.

그러나 아직은 노 대통령의 진정성을 믿고 싶다. 과거 지지세력의 반발을 무릅쓰고 한.미 FTA 추진을 결심한 용기와 함께 이를 관철할 리더십을 갖춘 인물은 노 대통령밖에 없기에 하는 말이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