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월드컵 당시 박지성(21번)의 유니폼을 입은 하현욱씨가 대한축구협회 응원 머플러를 펼쳐들고 활짝 웃고 있다.
서울의 한 안마시술소에서 일하는 하현욱(26)씨는 1급 시각장애인이다. 축구를 지독히 좋아하는 그는 TV.라디오 중계나 인터넷 서핑(문장을 읽어주는 기계가 있다)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큰 경기가 있을 때는 항상 경기장을 찾는다. 그는 라디오를 들으며 50배율이 넘는 고성능 망원경으로 공과 공 주위 선수들의 움직임을 본다. 선수 개개인을 식별해 낼 수는 없고, 유니폼 색깔로 두 팀을 구분한다.
그는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부산(한국-폴란드), 인천(한국-포르투갈), 광주(한국-스페인 8강전) 경기를 현장에서 봤다. 돈도 많이 들었고, 다니던 안마시술소도 한 달간 그만둬야 했다.
그는 월드컵 첫 승의 감격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황선홍 선수의 첫 골이 들어갔을 때,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리는 것 같았어요."
가족 중에 시각장애인은 하씨뿐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백내장으로 앞을 보지 못했다. 그나마 일곱 살 때 수술을 해 지금의 시력을 갖게 됐다. 부산맹학교에 다니면서 틈만 나면 약시(弱視) 친구들과 어울려 축구를 했다. 중등부 시절, 고등부 선배들이 안마를 가르쳐 줬다. 정성껏 안마를 하면 용돈을 주는 형들이 있었다. 하씨는 그 돈으로 축구 입장권을 사 구덕운동장을 찾았다. 대우 로얄즈의 전성기였던 1993년엔 대우의 홈경기를 하나도 빠지지 않고 봤다.
하씨가 축구장을 찾는 이유는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와 감동' 때문이다. "서포터스와 하나가 돼 응원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경기에 몰입하는 겁니다." 그는 야구장에선 장내 중계를 라디오로 들을 수 있는 시스템이 돼 있는데, 축구장엔 없어 아쉽다고 했다.
인천에 사는 하씨는 전철을 세 번 갈아타고 출퇴근한다. 새벽에 열리는 유럽 리그 경기를 보고 나면 출근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수입이 더 많은 밤 근무 대신 낮 근무를 택했다. 해외여행은커녕 국내선 비행기 한 번 타 본 적이 없는 하씨는 독일 월드컵만은 꼭 가고 싶었다. 그러나 경비 마련도 쉽지 않고, 혼자 갈 엄두도 안 나 포기했다.
최근 국제축구연맹(FIFA)이 시각장애인에게 월드컵 티켓 640장(한 경기에 10장씩)을 배분했다. 하씨는 "그런 뉴스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물론 한국에는 표가 배당되지 않았다. 그는 "대한축구협회도 A매치 때 시각장애인에 대한 배려를 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각장애가 없었다면 틀림없이 축구선수를 했을 겁니다. 그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대신 축구단을 하나 만들고 싶습니다. 선수들의 뭉친 근육도 안마로 풀어주고, 선수들의 마음도 풀어줄 수 있는 구단주가 될 겁니다."
글.사진=정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