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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3대 과제 이렇게 풀자] 上. 이라크 파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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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중앙일보는 이라크 추가 파병, 농산물 시장 개방과 원전수거물관리시설(원전센터) 등 국정 3대 과제를 다루는 좌담회를 연속해 마련합니다.

첫회로 미국의 이라크전 추가파병 요청에 대한 학계와 국방전문가의 시각을 진단했습니다.

참석자들은 한.미 동맹의 중요성에 공감하면서도 파병을 둘러싼 국론 분열을 피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먼저 유엔결의안 확보 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대통령과 정부도 명분을 살리고 실리도 챙길 수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길정우=파병문제를 둘러싸고 적지않은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청와대와 정부.정치권이 국민들의 여론 향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과연 파병이 타당한가부터 짚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박용옥=과연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파병을 피할 수 있느냐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라크 평화 정착과 재건 문제가 국제사회 전체의 과제로 떠올랐는데 우리가 과연 수수방관만 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누가 주도하든 파병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장달중=전 견해가 다릅니다. 파병의 불가피성을 말씀하셨는데요.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큰 게 사실이지만 기정사실화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이른 감이 있습니다. 파병이 이라크 재건이나 평화를 위한 것이냐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고 국제적으로도 파병의 타당성을 구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이 국제사회를 설득하려면 시급히 유엔 주도로 이라크를 재건토록 정책을 바꿔야 합니다. 미국이 조금 양보하면 우리 정부도 파병문제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문정인=비전투병력은 모르겠지만 전투병 파병 결정은 어려울 것이라고 봅니다. 이라크 전쟁의 성격 자체를 둘러싸고도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평화를 위한 것이냐, 아니면 침략전쟁이냐'인데 우리 헌법상 후자일 경우 파병은 안 되는 겁니다.

파병을 위해서는 세 가지 명분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이라크전을 빨리 '미국 주도화'에서 '유엔화'로 성격을 바꿔야 합니다. 둘째는 미국이 이라크 복구에 대한 로드맵을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려운 뒤치다꺼리는 다른 나라에 떠넘기고 경제복구 과정에서 이익은 자기들이 챙기겠다면 누가 동참하겠습니까.

셋째는 노무현 대통령의 결단입니다. 문제는 노무현 정권이 '평화'라는 컨셉트를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됐기 때문에 파병문제와 관련해 국민을 설득하고 어려운 결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盧대통령은 매우 어려운 시험대에 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용옥=파병문제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문제라거나 의리 차원에서 미국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봐서는 곤란합니다. 이라크에 대한 파병이 국제사회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이라크 문제를 빨리 해결할 수 있는 요소로 봐야지 선심을 쓰는 문제는 아닙니다.

전투병이라는 용어도 잘못됐습니다. 부대 자체를 보면 전투병으로 돼 있으나 역할은 이라크 재건 과정에서 테러 대처와 경찰.교육지원 문제 등을 다루는 치안유지군 성격으로 봐야 합니다.

문정인=이미 미국은 이라크 상황을 '저강도 분쟁'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러나 이라크 어디에 주둔하더라도 인명피해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남부의 바스라나 중부 바그다드, 북부의 모술지역 어디든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럴 경우 국내적 반발이 엄청날 것입니다.

장달중=지난 7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리처드 롤리스 미 국방부 부차관보 등 미국의 외교안보정책 담당자들을 두루 만났는데 의외의 경험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과연 한.미 동맹을 믿을 수 있느냐. 한국을 믿고 함께 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한국과 미국의 전략적 목표가 다른 마당에 신뢰 차원의 문제는 더 이상 아니라고 답변하더군요.

길정우=정부가 파병문제를 꺼낼 때 과연 한.미 동맹 말고는 내세울 명분이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제기됩니다. 정말 대안이 없는 건지 말씀해 주시죠.

문정인=바로 그런 대목을 미국이 채워줘야 합니다. 미국도 이제는 이라크 문제가 국제공조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을 겁니다. 1991년 9월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했던 말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이라크의 모든 문제는 국가의 이익을 떠나 유엔 주도로 공조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었습니다. 미국은 유엔 결의안을 채택케 하고 국제사회에 대외정책의 전환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 정부도 파병 논란의 수렁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박용옥=미국도 타협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그런 요구를 내세워 우리가 파병을 당장 거부하고 나서도 안 됩니다. 이라크엔 내전이 계속되고 다국적군의 피해도 잇따를 것입니다. 피해가 나면 안 가고 안 나면 가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국익이나 전략이란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장달중=현실적으로 파병 거부는 어렵다는 게 대세인 듯합니다. 하지만 국회나 국민 여론 역시 국익 관점에서 결정해야 한다는 데는 공감대가 이뤄지고 있는 양상입니다.

그런데 국익이 과연 무엇인가를 결정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국익 결정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한.미 동맹입니다. 정부도 국민들에게나 대외적으로도 한국의 외교안보적 장기 목표가 무엇인지 차제에 분명히 밝히는 게 좋습니다.

문정인=이번 사안은 여론의 향배가 중요하다는 측면에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너무 앞서가면서 성급하게 예단하기보다는 조사단이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부가 이를 토대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에 대해 면밀히 짚어주었으면 합니다.

길정우=정부의 이라크 현지 조사단 파견은 파병 과정을 놓고 보면 명분 쌓기에 그치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솔직히 듭니다. 언론의 역할을 말씀하셨는데 정부가 파병 요청을 받고 쉬쉬한 것도 문제라고 지적하고 싶군요.

그나마 언론이 알리지 않았으면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미국을 방문한 길에 미국 관리로부터 이야기를 처음 듣는 극단적인 형태가 됐을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랬다면 아마 더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문정인=자꾸 10월 중순까지 결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언론이 얘기하는데 꼭 그럴 필요가 있다고 보지는 않아요. 왜 부시가 한국 등에 파병을 요청하겠습니까. 내년 대선에서의 재선 때문입니다.

또 노무현 대통령도 내년 총선을 계산하고 있을 거고요. 파병이 이렇게 연동돼 있기 때문에 풀기가 어려운 겁니다. 파병이 내년 3, 4월로 늦춰진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총선 이전에 파병은 힘들 것이라고 봅니다.

박용옥=한.미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 차원의 상호 신뢰와 연합방위력 제고입니다. 동맹이라면서 군이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관계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군도 자신감을 갖고 펜타곤과의 교감을 활발히 하는 등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면 합니다.

문정인=결국 파병이 이뤄져야 한다면 유엔 중심 체제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한국이 오히려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합니다. 현지조사를 철저히 하고 부대도 상당한 규모를 갖춰 보냄으로써 우리 자체적으로 지휘체계를 갖고 움직이게 하자는 겁니다.

경보병과 기계화대대는 물론 통신과 정찰 등 지원체제도 잘 갖춰 한번 제대로 된 평화유지군을 보냈으면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국가적인 위상이 올라갈 수 있을 겁니다.

장달중=오늘 대화에서 크게 세 가지가 제기된 것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한.미 동맹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하는 것과 경제적 실리를 어떻게 취할 것인지 하는 문제, 그리고 국가의 격을 높이는 계기로 삼기 위해 입장을 어떻게 취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정부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는 어려운 문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국내 선거와 연동시켜 생각한다면 더 어려워질 것이란 점을 끝으로 강조하고 싶습니다.

박용옥=드러내 놓고 얘기하기 어려운 대목이긴 하지만 해외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한다는 것은 군사실리라는 측면에서 엄청난 플러스 요인이 됩니다. 해외에서 독자적인 작전능력 범위를 설정하고 물자를 공수하며 병력을 훈련시키는 작업들은 우리의 군사역량에 엄청나게 기여할 것입니다. 사실 베트남전 이후 우리 군은 별다른 전투경험을 갖추지 못해온 게 사실입니다.

문정인=실리를 너무 드러내 놓고 강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라크 파병을 북핵 문제 해결과 연계한다든지, 주한미군 재배치, 복구사업 이권 챙기기 등을 너무 앞세운다면 역효과가 날 수 있습니다. 이런 대목은 수면하에서 협상하고 파병문제와 관련해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명분을 살리는 작업에 주력했으면 합니다.

정리=이영종.강찬호 기자, 사진=김춘식 기자

<이라크 추가파병 관련 일지>

9월 3일 리처드 롤리스 미 국방부 부차관보, 정부 관계자에게 이라크 추가 파병 비공개 타진

9일 황영수 국방부 대변인, "미, 추가 파병 요청" 첫 공개

15일 정부 고위 관계자, "미, 파병 규모 관련 폴란드형 사단 거론"

16일 노무현 대통령, 국무회의에서 "각별히 신중하게 검토" 밝혀

17일 롤리스 부차관보,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에게 "파병 규모 여단과 사단의 중간급" 언급

18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 파병 문제 신중 대응 입장 재확인

19일 국방부, 이라크 현지 조사단 24일 파견 계획 공식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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