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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무당'을 만나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04호 34면

일러스트레이터 밥장의 통영놀이

며칠 전 남해안별신굿 이야기 들으러 가자는 제안에 ‘그럼 무당 만나러 가는 건가, 무당은 좀 무서운데 ’라며 살짝 겁먹었다. 하지만 통영과 거제를 비롯한 남해안 일대에 계승되고 있는 전통을 배운다는 마음으로 친구들과 함께 이순신 공원에 갔다.  


공원 내 통영예능전수관에는 남해안별신굿 보유자인 인간문화재 정영만 명인이 산다. 벌건 부적들과 민화풍의 화려한 그림이 걸려 있고 향 냄새가 진동하는 곳이라 이미 짐작했는데, 거실에는 자동차 좋아하는 아이가 있는지 전동 자동차와 장난감 자동차들이 굴러다녔다. 여느 집과 다를 바 없었다. 명인과 인사를 나누는데 옷이라도 개량한복 정도는 입고 계실 줄 알았다. 하지만 평범한 안경에 평범한 티셔츠와 바지차림이었다. 길에서 만나도 쉽게 지나칠 만한 평범한 어르신의 모습이었다. 무당과 인간문화재에 대한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굿을 한다면 무당을 떠올리죠. 무당이라면 당연히 영화 ‘곡성’에서처럼 휘파람 불고 장독대에서 죽은 까마귀 찾아내고 혼령도 불러내고요. 그런데 무당은 점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느 목사님이 제게 진짜 혼이 보이냐고 물어보더군요. 그래서 ‘목사님은 보여요? 저는 안 보입니다’라고 대꾸했어요. 저도 사람인데 사람한테 귀신이 보일 리 있겠어요? 무당이 하는 굿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을 위로하는 행위입니다.”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굿=무당=무속인=미신’이라는 선입견은 조금씩 사라졌다. 남해안별신굿은 세습무로서 집안 대대로 내려왔다. 그는 11대째 대물림받았으며 명인의 2남1녀 모두 국악을 전공하고 아버지 곁에 남아 대를 이으려 애쓰고 있다. 그에게 굿은 종교행사보다 마을축제에 가까웠다. 마을이 오랫동안 편안하길 기원하며 첫 번째 조상과 마을을 둘러싼 산과 물, 자연에 제를 드렸다. 또한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잡신(?)들까지 달래주었다. 사람이 모이면 음악과 공연이 빠질 수 없다. 무당은 제에 필요한 집기와 의상, 장신구부터 무대·연주·공연까지 모두 담당하는 이른바 종합문화예술인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볼수록 굿은 일본 여행에서 보았던 동네축제인 마쓰리(祭り)에 가까웠다. 마쓰리는 동네 사람들만 참여할 수 있으며 (구경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일 년 전부터 자발적으로 준비한다. 그도 “그 비유가 맞다”며 “굿은 동네 축제문화로 일제 강점기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고 전했다. 되레 해방되면서 굿 문화가 점점 사라졌으며, 굿이라면 작두나 타는 광신굿이나 미신쯤으로 왜곡되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스스로 ‘바보무당’이라고 불렀다. 점도 못 보고 귀신도 못 부르니 무당으로 할 줄 아는 게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번 더 확인하자면, 그는 남해안별신굿의 ‘대사산이’(통영 굿판에서 가장 큰 악사를 일컫는 말)로 으뜸이 되는 남자 무당이다.
한 시간 반 동안 편안하게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는 젊은 친구들이 굿에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며 따뜻하게 악수를 건넸다. 그리고 몇 백 년 동안 집안 대대로 내려온 보물인 부채를 꺼내 보여주기도 했다. 만약 통영에 관광을 목적으로 오가기만 했다면 그를 가까이서 편히 만날 수 있었을까 싶었다.

그와 헤어지고 함께 온 통영 친구들과 맥주를 홀짝거리며 뒤풀이를 했다. 평범한 ‘생맥’이었지만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통영살이가 계속될수록 알게 되는 참맛 같다고나 할까. 내년 초에는 꼭 거제 죽림마을에 가리라 다짐했다. 죽림마을은 남해안별신굿이 유일하게 명맥을 잇고 있는 동네다.

작가ㆍ일러스트레이터ㆍ여행가. 회사원을 때려치우고 그림으로 먹고산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호주 40일』『밤의 인문학』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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