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알쓸신세] "노벨상 박탈해라"···학살 방관자로 추락한 아웅산 수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국 시간으로 5일 저녁, 올해의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발표됩니다. 한반도의 해빙 무드를 이끌어낸 문재인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수상 여부가 국제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죠. 그러나 노벨 재단이 평화상 수상자 발표를 앞두고 3일(현지시간) 연 기자회견에서는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습니다. 미얀마의 민주화를 이끈 공로로 199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던 아웅산 수치(73) 미얀마 국가 고문입니다.

2013년 강원도 평창에서 열린 '글로벌 개발 서밋(Global Development Summit)'에서 연설하고 있는 아웅산 수치 미얀마 국가 고문. [중앙포토]

2013년 강원도 평창에서 열린 '글로벌 개발 서밋(Global Development Summit)'에서 연설하고 있는 아웅산 수치 미얀마 국가 고문. [중앙포토]

미얀마를 장악한 군부의 폭정에 맞서 저항 운동을 벌였던 수치 여사가 최근 국제적인 비난에 휩싸였습니다. 지난 해부터 미얀마에서 일어나고 있는 로힝야족 학살을 방관하고 있단 것이 이유입니다.

소수 민족에 대한 인권 침해에 눈감고 있는 수치 여사에게 수여했던 과거 노벨평화상을 취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노벨 재단의 라르스 하이켄스텐 사무총장이 나섰습니다. 그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수치의 행동은 유감이지만, 노벨상 자체를 박탈하지는 않겠다”고 밝히며 복잡한 속내를 털어놓습니다.

“우리는 수치가 미얀마에서 한 일들이 많은 의문을 낳았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핵심 가치인 인권을 지지한다. 따라서 그녀에게 (로힝야 사태에 대한) 일정 부분 책임이 있고 이는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렇더라도 노벨상을 박탈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믿지 않는다. 노벨상 수상자가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일을 사후에 저지르는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이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번 [고보면 모있는 기한 계뉴스]에서는 ‘민주화의 상징’에서 인권을 탄압하는 정치인으로 변모한 아웅산 수치의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미얀마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유엔 “로힝야족 탄압, 인종 청소의 교과서”

지난 해 8월 25일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州)에서 이슬람계 소수민족인 로힝야족 반군 단체인 로힝야구원군(ARSA)이 핍박 받는 동족을 위해 싸우겠다며 경찰 초소 30여 곳을 급습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미얀마 정부군은 즉각 반격에 나섰고,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소탕 작전을 벌이죠. 이 과정에서 두 달 간 최소 1만 명이 미얀마 군대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70만 명이 넘는 로힝야족이 국경 너머 방글라데시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미얀마 정부의 탄압을 피해 방글라데시로 피난한 로힝야족 난민들이 발룩칼리 난민캠프에서 구호품을 받기 위해 손을 뻗고 있다. [AP=연합뉴스]

미얀마 정부의 탄압을 피해 방글라데시로 피난한 로힝야족 난민들이 발룩칼리 난민캠프에서 구호품을 받기 위해 손을 뻗고 있다. [AP=연합뉴스]

유엔 진상조사단이 올해 8월 말 발표한 보고서의 내용은 참혹합니다. 미얀마군은 반군 토벌을 빌미로 테러와는 관련 없는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고 집단 성폭행, 방화, 고문 등을 저질렀습니다. 사람들을 담뱃불로 고문하고, 어린아이들을 불타는 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는 증언도 나옵니다. 유엔은 이번 사태를 ‘명백한 인종 청소’로 결론 내리면서, 학살을 주도한 미얀마 고위장성 6명을 국제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의 비난이 쏟아지자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족 살해 사실을 지난 1월 인정합니다. 하지만 로힝야 반군 단체가 빌미를 제공했으며, 정부군은 이에 대응했을 뿐이라는 입장을 고수하죠. 미얀마 정부는 유엔의 조사 요구에도 협조하지 않았고, 학살 흔적이 남아 있는 로힝야족 마을 수십 여 곳을 중장비로 밀어버리기도 했습니다.

“폭력에 눈감는 이에게 명예는 없다”

미얀마 정부의 이런 대응이 국제사회에 더 큰 실망을 안긴 것은 현재 미얀마를 통치하는 인물이 한때 민주화의 상징으로 국제적 지지를 받아 온 아웅산 수치 여사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15년 간의 가택 연금을 포함해 27년 간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수치 여사는 2015년 총선에서 자신이 이끄는 정당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을 승리로 이끌며 정권을 잡았습니다.

미얀마의 사실상 지도자 아웅산 수 치 여사(오른쪽)와 만난 프란치스코 교황. [EPA=연합뉴스]

미얀마의 사실상 지도자 아웅산 수 치 여사(오른쪽)와 만난 프란치스코 교황. [EPA=연합뉴스]

외국인과 결혼한 사람은 대통령에 출마하지 못한다는 미얀마 헌법에 따라(수치의 남편은 영국인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공식 직함은 ‘국가 고문’이지만, 실제로는 국가의 최고 통치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수치 고문은 로힝야 탄압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을 ‘가짜뉴스’라고 일축하고, “미얀마의 상황을 모르는 이들의 말”이라며 애매한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지난 해 BBC와의 인터뷰에선 미얀마 정부의 책임을 일정 정도 인정하면서도 “인종 청소라는 표현은 과하다”고 답했죠.

그 뿐 아닙니다. ‘아웅산 수치의 미얀마’에서 자유와 인권이 억압되고 있는 사례가 계속 드러납니다. 올해 초에는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한 대학생들을 체포, 구금했습니다, 수치 고문은 지난 달 로힝야족 학살 문제를 취재하다 미얀마 경찰에 체포돼 7년 형을 선고 받은 로이터 통신 기자 두 명에 대해 “그들의 체포는 표현의 자유와는 상관이 없다”며 이들을 석방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1990년대 가택 연금 상태의 아웅산 수치 [중앙포토]

1990년대 가택 연금 상태의 아웅산 수치 [중앙포토]

이런 수치 여사의 행동에 실망해 과거에 수여한 ‘영예’를 거둬들이는 움직임도 이어집니다. 지난해 11월 영국 옥스포드 시의회는 수지 여사에게 1997년 부여했던 명예시민 훈장을 박탈했죠. 미국 홀로코스트 추모 박물관도 올해 초 2012년 수치 여사에게 수여한 ‘엘리 비젤상’을 취소한다고 발표했죠. 박물관은 취소 사실을 알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폭력에 눈감는 이에게 명예는 없다.” 지난 2일 캐나다 상원의회도 수치를 “인간 학살 공범자”라고 비판하며 2007년 부여한 캐나다 명예시민권을 박탈했습니다.

종교가 다른 죄? 뿌리 깊은 갈등

이런 수치 여사의 태도에 대해 ‘권력의 단맛에 취했다’거나 ‘군부와 타협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로힝야 문제의 뒤에 도사린 미얀마의 복잡한 역사와 종교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미얀마는 인구의 68%를 차지하는 버마족을 중심으로 샨족(9%), 캬렌족(7%), 라카인족(4%) 등 무려 135개에 이르는 민족이 모인 다민족 국가입니다. 이 중 약 90%가 불교도죠. 19세기 영국-미얀마 전쟁 후 수십 년간 지속된 식민지 시기 동안 각 민족은 친영(親英), 반영(反英) 등으로 분열돼 서로를 박해했죠.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다민족이 화합하기 어려운 토양이 이때 생겨났습니다.

미얀마 국경을 넘어 도피하는 로힝야 난민들 [AP=연합뉴스]

미얀마 국경을 넘어 도피하는 로힝야 난민들 [AP=연합뉴스]

특히 로힝야족은 이슬람교를 믿는데다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해 불교도가 대부분인 미얀마 사회에 융화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족이 영국이 식민 통치를 위해 방글라데시로부터 이주시킨 불법이민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영국을 등에 업고 버마인의 터전을 빼앗았다’는 미움이 이때부터 시작됐죠. 2차 세계차대전이 일어나자 버마족은 독립을 위해 일본과 손을 잡았으나, 로힝야족은 영국군에 들어갑니다.

현재 로힝야족은 미얀마의 공식적인 국민도 아닙니다. 1982년 군사정부는 시민권법을 개정해 1824년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 이전부터 미얀마에 거주한 사람들만 소수민족으로 인정하기로 합니다. 로힝야족의 미얀마 국적을 사실상 박탈하는 조치였죠. 이에 반발한 로힝야족이 반군을 중심으로 과격한 공격에 나서면서 버마족을 비롯한 미얀마인들의 반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지게 됩니다.

아웅산 수치의 문민 정부는 소수 민족의 무장 투쟁 종식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출발했지만 해묵은 갈등을 푸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정치적 통제가 완화되면서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괴롭힘은 더 돌출되기 시작합니다. 불교 근본주의자들은 “로힝야족은 미얀마인이 아니니 모두 내쫓아야 한다”고 대놓고 주장하죠. BBC는 이렇게 분석합니다. “아웅산 수치의 태도는 로힝야족에 대한 동정심이 거의 없는 대다수 미얀마인들의 정서를 고려하고, 불교 신도가 90%를 차지하는 다민족 국가를 통치해야 하는 실용주의 정치가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도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군부와의 관계입니다. 2015년 선거로 군부 세력은 상당히 약화됐지만, 아직도 의회 의석의 25% 가량을 차지하며 국방이나 치안 통제권을 쥐고 있습니다. 아웅산 수치가 이들과 등을 돌려 로힝야족의 편에 설 경우, 로힝야족을 싫어하는 국민 정서를 등에 업은 군부 세력이 새로운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겁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이들이 없는 세상”

로힝야 문제가 역사·종교·정치적으로 복잡한 문제임을 감안하더라도, 수치에 대한 국제사회의 실망감은 줄어들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를 위해 저항했던 이가 정작 자신의 사회에서 가장 고통 받고 있는 집단의 문제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2년 6월 16일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에서 21년만의 노벨상 수락 연설을 하고 있는 아웅산 수치. [사진 노벨재단 홈페이지]

2012년 6월 16일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에서 21년만의 노벨상 수락 연설을 하고 있는 아웅산 수치. [사진 노벨재단 홈페이지]

아웅산 수치는 1991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군부 세력의 방해로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21년이 지난 2012년에야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를 찾아 노벨상 수락 연설을 합니다. 이 연설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삶의 터전과 집을 잃은, 희망을 잃어버린 이들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세계의 구석구석이 사람들이 자유와 평화 속에 머물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중략) 우리가 안전하게 잠들고, 행복하게 깨어날 수 있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에 함께 해 주십시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알쓸신세 더 보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