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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여 빨치산 "발붙일 곳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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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산청=허상천·최형규 기자】『김일성에게 속아 지낸 지난날들이 죄스럽고 한스러워 하늘을 쳐다볼 수가 없습니다. 단 하루라도 사람 속에 묻혀 마음놓고 살고 싶은 게 마지막 소원입니다.』
지리산 최후의 빨치산이며 김일성으로부터 여장군이란 칭호를 받을 만큼 악명을 휘날렸던 정순덕씨(56).
이제 그녀는 반백과 주름살 너머로 얼룩진 죄과에 대한 회한과 함께 지리산 기슭 한 언저리에서 새해의 먼동을 지켜보며 외로운 나날 속에 빈 가슴을 메우고 있다.
젊었을 때 한순간 잘못된 사상의 희생물이 되어 빨치산 13년, 옥살이 22년 등 35년을 세상과 격리되어 살아온 정씨는 자신이 누볐던 빨치산의 메카(?)이며 피의 현장인 경남 산청면과 산장면 삼강골에 다시 섰지만 신출귀몰했던 과거의 의용은 찾을 길 없고 참회의 눈빛만이 안면에 가득하다.
뒤틀린 인생과 그 죄업.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세인의 눈이 두려워 고향이기도 한 이곳 산자락에서 고독한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
정여인의 빨치산과의 인연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베틀 속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17세의 새색시로 원앙빛 신혼 단꿈에 젖어있던 50년 11월 2일. 남편 성석조씨(당시 18세)가 인민군 점령시 민족애국청년단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수복 후 빨갱이로 몰리게 되자 자진해서 지리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후 정여인은 남편을 찾아다니는 토벌대로부터 숱한 괴로움을 당했고 이에 견디다 못해 곧 남편을 찾아 운명의 빨치산 행을 한 것.
산 속에서 남편을 만난 정여인은 주력부대의 취사부로 빨치산 식구가 돼 한 많은 13년의 빨치산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의 빨치산은 거목 이현상을 총수로 그 휘하에 1만5천여명이 모여 가위 지리산 인민공화국의 면모였다.
빨치산생활 두달만에 남편 성씨가 보급투쟁을 나갔다 토벌대에 죽었다.
남편의 최후를 목격한 그녀는 이미 과거의 정순덕이 아니었으며 조선노동당원으로 정식 입당, 본격적인 사상교육과 혹독한 유격훈련을 받아 세상을 등진 빨치산이 됐다. 『산 타고 보급투쟁하고 사람 죽이는 일이 일과였습니다].』당시를 회상한 정여인의 입술은 바르르 떨렸다.
그녀가 앞장선 큰 사건만도 하동 화개골·산청군 삼청면 내원골 2가구 가족몰살사건과·악양 평사리 양곡탈취사건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당시 지리산기슭 마을아이들이 『정순덕이 온다』고 하면 울음을 그칠 정도였다.
이렇게 신출귀몰하고 악명을 떨쳤던 정씨가 마지막 빨치산으로 검거된 것은 지난 63년 11월 11일 새벽 2시.
자기가 태어난 산청면 내원리 성도복씨(55)집 안방에서 동료 이홍희씨(당시 32세) 와 함께 토벌대와 1시간의 총격전을 벌인 끝에 이씨는 사살되고 그녀는 오른쪽 다리에 입은 총상으로 현장에서 생포됐다..
「빨치산역사」가 끝나는 이 현장에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 최고회의의장이 남원에서 국회의원선거 지원유세를 마치고 함양으로 가다 정씨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달러와 토벌대를 격려했다.
수훈경찰관 산청경찰서 김영국경사와 박기덕 순경에게는 현상금 3백만원이 수여됐다.
정씨는 마산지법 진주지원 제1호 법정에서 국가보안법위반·살인강도·방화 등 혐의로 1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검찰 사형구형) 됐었고 대구고법에서 원심이 확정됐다. 진주·청주·대구교도소 등에서 22년간 복역하다 지난 85년 8월 15일 대구교도소에서 전향 등 모범수로 특별 사면됐다.
석방된 정씨는 그래도 자신의 죄업에 대한 세상의 기억이 두려웠다.
그래서 서울 모교 회 장로집과 충청도의 양로원 등을 전전하다 지리산에 은거하며 새해를 맞았다.
체포당시 받은 총상으로 오른쪽다리를 절단해 의족으로 몸을 지탱한 정여인은 구랍 28일 마른 긴 풀로 얼기설기 얽힌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 아버지의 유택을 찾았다.
『죽어도 오기 싫은 통한의 골짜기지만 임종도 못한 불효를 빌기 위해 묘소를 찾았습니다』 『많은 사람을 죽인 죄인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오랫동안 사람이 그리웠습니다.』 4년 동안 스스로의 죄에 대한 죄책감과 사회의 질시를 짊어지고 산 속에서 뉘우침과 외로움과 그리움 속에 살아온 정씨. 인간 없는 사회에서 인간답지 못한 자신을 깨우치면서 함께 사는 사회 속의 인간이 되길 비는 그의 얼굴에는 연민의 정이 가득 서려있다.
최후의 빨치산. 빨치산의 산증인. 정여인의 잔주름 골골에 맺힌 죄업과 회한. 그녀는 다시 애절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올해에는 사람과 더불어 단 하루라도 살아보고 싶습니다.』 고향은 그녀를 비극이전의 한 인간으로 맞아들일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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