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어느 가을, 나는 ‘관용’을 모토로 삼는 미국 어느 주의 시골 주차장에 앉아 있었다. 가족을 기다리며 졸고 있던 나는 거대 인파가 몰려드는 듯한 소음에 놀라 잠을 깼다. 살펴보니 정당 행사 때 간혹 출몰하는 ‘난닝구’를 갖춰 입은 외국인 남자와 처, 아이 2명이 소음의 원인이었다. 난닝구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뿐만 아니라 바닥에 침을 뱉고 있었다. 갯과 짐승들이 영역을 표시하는 방법이다. 가족들도 걸어가며 쉼 없이 쓰레기를 버리는데, 난닝구도 이에 질세라 담배꽁초를 힘껏 바닥에 내던진다. 아마 헨델과 그레텔처럼 집으로 돌아갈 길을 표시하는가 보다.
가만히 보니 어떤 노인이 그 가족 뒤를 따르고 있었다. 조용히 뒤를 따르던 노인은 그 담배꽁초를 줍는다. 그러더니 대수롭지 않게 휴지통에 넣었다. 하필 그 순간 그 가족은 무슨 연유인지 뒤로 돌았고, 난닝구도 그 모습을 목격했다. 노인은 난닝구에게 웃으며 “하이”라고 말하고 지나간다. 집으로 돌아갈 표식을 잃어버려서인지 아니면 부끄러움 때문인지 난닝구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얼굴에 깊게 새겨진 그 열패감을 지켜보며 나는, 그가 짐승의 삶을 버리고 관용을 베푸는 주민으로 다시 태어날 것 같다는 예감을 했다.
혐오의 시대다. 어찌나 혐오할 거리가 많은지 직업, 빈부, 성별, 나이에 따라 매일 새로운 혐오 대상이 생겨난다. 이런 시대에 혐오를 부추기면 권력과 명성을 가질 수 있다. 사람들은 혐오 대상자에게 온 마음 다해 악플을 달고 증오하며 또 널리 혐오를 공유한다. 물론 세상을 정화하려는 정의감의 발로일 것이다.
그러나 혐오로 세상을 정화하려는 시도는 수천 년간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십자군 전쟁, 마녀재판, 유대인학살, 문화대혁명 모두 처참한 상처만 남겼고, 결국 사람들이 배운 것은 공존을 위한 관용의 필요성이었다. 만약 그 노인이 난닝구의 모습을 촬영하여 소셜네트워크에 올렸거나 면전에서 나무랐다면 그 난닝구는 영원히 그곳 주민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혐오 속에서는 누구도 공동체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혐오는 기본적으로 무책임하다. 그래도 약이 올라 꼭 혐오를 해야겠다면 이렇게 자문해보자. ‘우리가 스스로 만드는 혐오의 그물 속에서 그 증오를 벗어날 자유를,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일까?’
김웅 대검찰청 미래기획단장(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