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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개혁의 외길, 공수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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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임장혁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임장혁 중앙SUNDAY 차장

임장혁 중앙SUNDAY 차장

‘죄가 안 됨’

지난 20일 서울중앙지법 허경호 영장전담판사가 유해용(52)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하면서 밝힌 이유는 양(3600자)만큼이나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범죄 소명이 부족하다거나 도주·증거인멸의 우려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게 아니라 ‘죄가 안 된다’는 기각 사유를 접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검찰은 유 전 판사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계류 중인 사건 진행 상황을 요약해 준 것에 공무상 비밀누설죄를, 재직 시절 취합한 재판연구관 보고서를 인쇄·다운로드해 집에 가져간 것에 공공기록물 유출죄를 걸었다. 3600자 곳곳엔 허 판사의 난감함이 묻어난다. “판사라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사건 진행 단계를 정리한 글을 어떻게 ‘공무상 비밀’이라 할 것이며, 모든 연구관이 공유·참고하는 보고서 사본을 어떻게 ‘공공기록물’이라고 할 것인가”라는 개탄에 가깝다.

댓글은 허 판사의 ‘제 식구 감싸기’를 탓했지만 아픈 건 검찰이다. 유 전 연구관은 검찰의 수사가 대법관·대법원장 등의 재판 거래 의혹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회할 수 없는 길목이다. 수석재판연구관은 대법원에 접수되는 모든 주요 형사 사건을 검토해 재판부에 의견을 내는 자리다. 그러나 ‘죄가 안 됨’은 수사의 미진함이 아니라 법 적용 자체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어서 보강 수사로 영장 재청구의 명분을 찾기도 어려워 보인다. 애초 범죄가 안 되는 이유로 유 전 판사의 집 등을 압수수색하고 그를 포토라인에 세운 셈이다. 댓글 여론과 달리 법조계에는 “요즘 검찰이 증거를 찾는 게 아니라 혐의를 찾기 위해 강제 수사를 한다”는 우려가 넘쳐난다.

이번 구속영장 청구·기각 사태는 검찰의 실수라기보다 지나친 자신감의 발현 또는 오만의 상징적 결과라고 보는 게 맞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하명수사’의 오명 속에 살다 ‘적폐청산’ 1순위에 몰렸던 1년여 전에 비하면 격세지감일 정도로 검찰은 커졌다.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과는 정반대다. 야심 찼던 법무·검찰 개혁위원회는 유야무야됐고, 서울중앙지검은 4차장 자리를 신설하며 조직을 키웠다. 각종 기관에 검사 파견을 줄이는 게 과제였지만 신설 안보지원사 감찰실장에 현직 검사를 앉히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고발권이 폐지되면 검찰은 기업 활동의 일상적 이슈인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를 들고 언제든 기업에 뛰어들 수 있게 된다. 그 와중에 사법부는 견제를 포기하고 자신의 목을 내놨다.

이제 ‘검찰 왕국’의 도래를 막을 길은 하나 남았다. 이번 정기국회에서 공수처 도입 법안을 처리하는 것이다. 야당이 생각을 달리할 때다.

임장혁 중앙SUNDAY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