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48)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은 지난 16일 전용기편으로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현대차 수석부회장의 고군분투 #평양행 포기하고 워싱턴행 선택 #USTR대표 등 고위 관료들 면담 #“FTA 합의했는데 장벽 없어야” #NAFTA 개정안 예외 적용도 제안
지난 14일 그룹 전체를 총괄하는 수석부회장으로 승진한 지 이틀만의 행보였다. 18~20일 제3차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단에 참석할 것이란 예상도 있었지만 정 수석부회장은 방북도 포기하고 미국 방문을 택했다. 그만큼 사안이 중대했다는 얘기다.
정 수석부회장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행정부 및 의회 관계자들과 연쇄 회동을 가졌다. 18~19일 윌버 로스 미국 상무장관을 만난 데 이어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면담했다. 정 수석부회장이 미국 행정부 고위 관료들을 찾은 건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무역확장법 232조와 관련해 국내 자동차 업계의 의견을 전달하고 호혜적 조치를 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다. 정 수석부회장은 조니 아이잭슨 조지아주 상원의원도 만나 협조를 부탁했다. 조지아주는 기아차 공장이 있는 곳으로 아이잭슨 상원의원은 여당인 공화당 소속이다.
무역확장법 232조는 미국의 통상 안보를 해친다고 판단될 경우 수입량 제한, 고율의 관세 부과 등을 취할 수 있게 한 법이다. 1962년 제정돼 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이후 거의 사문화 상태였지만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인 지난해 4월 대통령 행정명령으로 부활했다. 이 법이 발동되면 외국산 자동차에 대해 최대 25%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 대미 자동차 수출량의 절반가량을 국내에서 생산하는 현대차그룹으로선 명운이 걸린 조치인 셈이다.
정 수석부회장은 이번 방문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에 양국이 합의한 만큼 추가적인 관세장벽이 생기지 않도록 해줄 것을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 FTA 개정안은 2019년부터 단계적으로 철폐할 예정이던 한국산 픽업트럭에 대한 25% 관세를 2041년까지 유지하되 기존의 무관세 혜택과 미국산 부품 사용비율 상향 조정은 막아냈다. 하지만 무역확장법 232조가 발동되면 기존 FTA 개정안이 무력화될 가능성이 높다. 정 수석부회장은 한국산 자동차에 대해 FTA 개정안이 우선될 수 있도록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미국과 멕시코 간 합의가 이뤄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대해서도 미국 정부 관계자들을 설득했다. NAFTA 개정안에 따르면 멕시코산 자동차의 연간 수입량이 240만대를 넘을 경우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라 25%의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최근 멕시코가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의 생산기지로 성장하면서 연 40만대의 생산시설(기아차)을 가진 현대차그룹도 영향권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정 수석부회장은 무역확장법 232조, NAFTA 개정안 등과 관련해 한국산 자동차가 관세부과 예외를 인정받도록 미국 행정부 관계자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한·미 FTA 개정안에서 한국이 미국 안전기준을 통과한 미국산 자동차를 연 5만대까지 수입할 수 있도록 한 점도 강조했다. 한국이 미국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 장벽을 낮췄기 때문에 호혜적 입장에서 미국도 한국산 자동차에 혜택을 달라는 의미다. 정 수석부회장은 현대차그룹이 미국에 두 곳의 생산시설(현대차 앨라배마 공장과 기아차 조지아 공장)을 만들어 고용을 창출하는 등 미국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도 부각했다. 현대·기아차가 두 곳의 생산공장과 협력사를 통해 고용한 인력은 5만명이며, 딜러 등 간접 고용한 인력을 더하면 8만5000여명에 달한다.
미국이 무역확장법 232조를 최종 발동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관세장벽이 높아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현대차그룹의 판단이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수석부회장이 방북 일정까지 빠져가면서 미국 방문에 나선 것은 그만큼 미국 관세장벽의 리스크가 급박하고 크다는 판단에서”라며 “무역확장법 232조가 한국 자동차 산업의 명운을 가를 수 있는 위협요소란 점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정 수석부회장은 이번 출장에서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과 기아차 조지아 공장도 방문했다. 최근 현지 생산에 들어간 신형 싼타페 생산라인도 집중적으로 점검했다고 현대차그룹 측은 밝혔다. 정 수석 부회장은 주말쯤 귀국할 예정이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