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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톰을 사랑한 소년, 서경배의 과학 베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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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생명과학 분야의 신진 과학자 5명에게 후원을 약속한 뒤 ’세상을 바꿀 연구를 해 달라“고 당부했다. [사진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생명과학 분야의 신진 과학자 5명에게 후원을 약속한 뒤 ’세상을 바꿀 연구를 해 달라“고 당부했다. [사진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몇 년 전 미국 샌디에이고 솔크연구소 명예의 전당에 들렀다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한쪽 벽에 솔크연구소가 배출한 노벨상 수상자가 새겨진 동판이 빛나고 있었는데 그 수가 11명이나 된 까닭이다.

노벨상 11명 낸 ‘솔크’ 한국판 야심 #“회사 망할 뻔할 때 과학이 살렸다” #3000억 연구재단, 1조로 키우기로 #“사업과는 무관 … 긴 호흡으로 연구” #과학자 5명에 연구비 125억 지원

아모레퍼시픽에 따르면 당시 서 회장은 “우린 노벨상 수상자가 단 한 명도 없는데 어떻게 연구소 한 곳에서만 11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느냐”며 “우리도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솔크연구소는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솔크 박사의 사재로 1960년 설립돼 생물학 특히 신경과학 분야에서 세계 1위로 평가받는 연구소다.

솔크 박사가 그랬던 것처럼 2016년 서 회장은 사재 3000억원으로 ‘서경배과학재단’을 설립했다. 출연금을 1조원 정도로 키우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서 회장은 “세계적인 과학재단은 출연금이 수십조원에 이를 만큼 규모가 크다”며 “우리도 규모를 더 키워 30년 후에는 뭔가 달라진 걸 만들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17일, 서경배과학재단은 올해 지원할 신진 과학자 5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선정된 5명은 모두 생명과학 분야에서 인류의 삶을 바꿀 주제를 연구하는 신진 과학자들이다.

김진홍 서울대 생명과학과 교수는 근골격계 퇴행성 질환에, 박현우 연세대 생화학과 교수는 암의 전이 메커니즘에 도전 중이다. 우재성 고려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세포 간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정인경 KAIST 생명과학과 교수는 3차원 지놈의 구조 변화 원리를 연구하고 있다. 주영석 KAIST 의과대학원 교수는 유전체의 구조 변이와 암세포 발현 간 관계를 캐고 있다. 이들은 매년 1인당 3억~5억원씩 5년간 총 125억원가량의 연구비를 지원받는다.

2018년 서경배과학재단 선정자 및 연구 분야

2018년 서경배과학재단 선정자 및 연구 분야

서 회장은 지난주 진행된 후원 증서 수여식에서 “난 항상 하늘 밖의 또 다른 하늘이 있다는 의미의 ‘천외유천(天外有天)’이라는 말을 되새기곤 한다”며 “여러분도 하늘 밖의 무궁한 세계를 꿈꾸며 세상을 바꿀 새로운 연구에 도전해 달라”고 당부했다.

서 회장이 기초과학, 특히 생명과학에 관심을 갖고 재단까지 만들게 된 건 어린 시절의 추억도 계기가 됐다.

서 회장은 과학재단 설립 발표 당시 “어렸을 때 아톰 만화를 보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아톰 덕분에 과학에 특히 생물과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우주 소년 아톰’은 1970년대 동양방송(TBC)에서 방영된 로봇 애니메이션이다. 천재 과학자 텐마 박사가 만든 로봇 아톰이 21세기를 배경으로 과학을 통해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든다는 줄거리다.

아톰을 좋아했던 서 회장은 회사 경영에 참여하면서 다시 과학의 힘을 절실히 깨달았다. 서 회장은 “회사가 1991년 총파업으로 속된 말로 거의 망할 뻔했다”며 “그 와중에 입사해 처음 한 게 92년 경기도 용인의 태평양종합기술연구소를 신축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장 어려울 때 했던 일인데 이후 과학의 힘을 통해 회사가 다시 일어서게 됐고, 그로 인해 과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이후 20여 년간 회사 연구소를 운영하며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 결심이 확고해졌다. 기초과학은 응용과학의 이론적 바탕이 되고, 산업화로 연결되는 밑바탕이지만 국내에서는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서 회장은 “기업의 연구소는 돈에 쫓기게 마련이다. 대개는 3~5년, 길어야 10년의 중단기 연구만 한다. 우리 회사도 20년 걸리는 중장기적 연구는 안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업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그래서 돈에 얽매이지 않고 긴 호흡으로 할 수 있는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과학재단을 운영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장정훈 기자 cc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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