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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판 강남은 평양역 앞···60평 2억, 로열층 1~10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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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국가안보전략연구원 공동기획 - 평양·평양사람들①

지난해 가을 입국한 탈북자 A씨(47)는 “한국에 와보니 집을 알아봐주는 사무실이 별도로 있더라. 북한에선 집데꼬들이 암암리에 해 준다”며 남북을 비교했다. 정부에서 제공한 임대주택 대신 전세 아파트를 알아보다가 발견한 남북의 차이다. A씨는 아파트단지 곳곳에 간판을 걸고 사무실에서 ‘버젓이’ 영업하는 공인중개사를 접하곤 “이렇게 해도 처벌받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거래 건당 500~1000달러 수수료 #휴대폰 통화시간 모아 파는 ‘와꾸’ #사설 환전상·택배 등 새 직업 등장 #교사들은 개인 과외 부업 나서

북한에선 국가가 직업을 정해 준다. 그런데 이 공식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신종 직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어서다. 한국에서처럼 공개 직업이 아닌 일종의 부업 차원에서다. 한국에 공인중개사가 있다면 북한엔 ‘집데꼬’라고 불리는 거주권 중매인이 있다. 데꼬(テコ)는 일본어로 ‘지렛대’ 또는 ‘도와주는 사람’을 뜻한다.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에선 부동산 소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국가는 주민들에게 거주할 권리, 즉 ‘거주권’을 줄 뿐이다. 그러나 오랜 기간 거주하다 보니 거주권은 소유권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이를 거래하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자연히 거래를 중개하는 북한판 공인중개사가 필요해졌다.

북한이 평양의 랜드마크로 대동강변에 새로 조성한 미래과학자 거리의 아파트 단지. 시내 일부 단지는 20만 달러에 거래되기도 한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북한이 평양의 랜드마크로 대동강변에 새로 조성한 미래과학자 거리의 아파트 단지. 시내 일부 단지는 20만 달러에 거래되기도 한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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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거주했던 탈북자 B씨는 “과거에도 집거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최근엔 아예 이를 직업처럼 하는 사람이 생겨났다”고 귀띔했다. 그는 “집데꼬들은 사무실을 차릴 수 없는 만큼 휴대전화나 안면을 통해 거래하고 있다”며 “머릿속에 매물 정보를 줄줄 꿰고 있어 원하는 조건을 말하면 매물을 찾아준다”고 설명했다. 땅집(일반주택)이나 살림집(아파트)마다 대강의 시세가 정해져 있고, 흥정도 이뤄진다고 한다. 평양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는 평양역 근처에 위치한 36층짜리 아파트로 200㎡(60평) 한 가구가 약 20만 달러(2억2000만원)에 거래된다는 게 복수의 탈북자 증언이다. 전망이 좋은 고층을 선호하는 한국과 달리 1~10층이 북한에선 로열층이다. 잦은 정전으로 엘리베이터가 고장났을 때도 걸어서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집데꼬는 행정위원회(한국의 시청·구청 해당)의 거주권 교체를 위한 행정 절차를 포함해 거래 건당 500~1000달러(55만~110만원)의 수수료를 받는다고 한다.

전국 460여 개 시장(장마당)이 활성화하면서 장마당 신종 직업도 만들어졌다. 좁은 판매대에 진열하기 어려운 냉장고 같은 대형 전자제품은 ‘중기집’(중요한 기기를 파는 집)에서 거래된다. 카탈로그를 보여준 뒤 중기집으로 데려가 현물을 구경시키는 식이다. 장마당 근처에선 허리에 전대를 차고 “필요한 돈이 있냐”며 접근해 북한 돈을 위안화·달러 등으로 바꿔주는 사설 환전상 ‘돈데꼬’나 상인들의 물건을 인근 또는 다른 지역으로 배달해 주는 ‘짐쏘기’를 전문으로 하는 북한판 택배업자도 등장했다. 북한에도 애를 봐주는 벌이가 있다. 북·중 국경 도시에서 생활하다 탈북한 C씨(39)는 “북한 탁아소는 오후 4시쯤 문을 닫아 시장에서 장사하는 부모들의 애를 밤늦게까지 봐주는 사설탁아소가 생겨났다”고 전했다.

휴대전화 사용이 늘어나며 다른 사람이 사용하다 남은 ‘여분의 통화시간’을 모아서 판매하는 ‘와꾸 판매상’도 나타났다. 와꾸란 ‘쿼터(quota)’와 유사한 의미인데, 기본으로 제공되는 사용량(한 달 240분) 중 예컨대 40분의 와꾸를 구매해 다른 사람에게 판매하는 방식이다. 현역 또는 퇴직한 교사들의 개인교습도 퍼지고 있다. 김보미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틈새시장을 찾다보니 새로운 직업이 등장하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어떻게 취재했나

월급 4000원(북한 돈)을 받는 사람이 한 끼에 만원이 넘는 식사를 한다? 최근 북한 경제의 ‘역설적인’ 모습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탈북자들은 북한 경제의 시장화가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기근과 경제난으로 대규모 아사자를 냈던 북한의 현재는 어떤 모습일까. 중앙일보와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이 공동으로 최근 입국한 탈북자와 국내외 정보를 바탕으로 ‘김정은의 북한’을 들여다봤다. 북한 당국에서 경제정책을 담당했던 간부급 탈북자들과 국경 및 지방에서 넘어온 탈북자들을 심층 면접했다.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의 신변안전을 고려해 탈북자들은 익명으로 보도한다.

◆ 특별취재팀=정용수·권유진·김지아 기자 nkys@joongang.co.kr
◆ 도움말 주신 분=김보미·김일기·이상근·임수호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박사(가나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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