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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in&Out레저] 연둣빛 용틀임 … 차밭 나들이 지금이 제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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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글=이훈범 기자 <cielbleu@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차밭 나들이는 이때가 제 맛이다. 입 안에서 감도는 차 맛을 음미하는 게 아니라 차밭에 파묻혀 온몸으로 다향을 느낄 수 있다. 막 올라온 햇빛을 담은 아침 이슬이 맺혀 용의 비늘처럼 빛나는 찻잎 끝에서 아스라한 다향이 피어올라 몸을 적신다. 촉촉한 아침 공기와 은은한 차 향기를 깊은 숨으로 들이마시면 광주 지나고 화순 땅 밟고 온 먼길 여행의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진다.

전남 보성군 일대의 다원들 중에는 옛날 소리꾼들이 넘었다는 활성산 봇재의 정상 직전에 있는 ㈜대한다업의 보성다원이 가장 유명하다. 1959년에 문을 열었으니 반세기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커다란 간판을 써붙여 놓진 않았어도 봇재로 이어지는 18번 국도를 가는 승용차들이 대부분 그곳에서 멈추니 길을 잃을 염려는 별로 없다.

다원에 들어서면 초행길인데도 어쩐지 낯설지가 않다. 영화나 드라마 CF에서 이미 여러 번 본 장소이기 때문이다. 영화 '선물'에서 이정재와 이영애가 걷던 삼나무 숲길, 드라마 '온달왕자들'의 신혼여행지, 한 이동통신 CF에서 비구니와 수녀가 함께 자전거를 타던 오솔길이 모두 이 다원 안에 있다. 이곳 제2다원에는 한쪽 구석에 지금도 영화 촬영을 위한 세트 설치가 한창이다.

진입로는 하늘을 가리며 줄지어 서 있는 높은 키의 삼나무길로 만들어졌다. 여행객들의 달뜬 마음을 가라앉혀 주려는 의도일까. 산비탈을 따라 만들어진 차밭은 서 있는 위치와 보는 시선에 따라 제각기 다른 풍경을 만들어낸다. 아무 데서 어디를 향해 셔터를 눌러도 그림엽서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보성다원은 사진작가들의 천국이다. 다원이 문을 열기도 전 이른 새벽부터 차밭 경사로를 따라 카메라 삼각대가 줄을 선다.

해질 무렵 석양에 물든 차밭 풍경도 못내 아름답다. 햇빛 기울기에 따라 이랑의 그림자 길이가 길어지면서 차밭의 줄무늬가 더욱 선명해진다.

요즘은 이웃 군에 수소문을 해도 찻잎을 따는 일손이 모자랄 정도다. 하루라도 빨리 따야 보다 높은 값을 받기 때문이다. 봄의 마지막 절기인 곡우(穀雨.올 4월20일) 전에 따면 우전(雨前), 일주일 뒤 따는 걸 세작이라고 한다. 우전과 세작을 합쳐 곡우차라 부른다. 이어 곡우 보름 후에 따면 중작, 그 뒤 다시 보름 후에 따는 걸 대작이라고 한다. 대작까지가 맏물차로 맛이 제일 좋다. 이후 45일마다 한번씩 1년에 세 번 수확할 수 있다. 두물차는 맛은 강하지만 감칠맛이 덜하며 세물차는 떫은 맛이 강하다. 9월 하순에서 10월 초에 수확하는 네물차는 엽차용으로 쓰일 뿐이다. 모양은 다 같이 보여도 전문가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

차에는 타닌.카페인.아미노산이 함유돼 있는데 타닌은 맏물차에 가장 적고 두물.세물차로 갈수록 많아진다. 두물.세물차가 더 떫은 맛이 나는 이유다. 아미노산은 차의 단맛과 관계 있으며 맏물차에 많고 두물.세물차로 갈수록 적다.

차나무는 1년 내내 날씨가 따뜻하고 연간 강우량이 1500㎜가 넘는 해양성 기후에서 잘 자란다. 한반도의 부족한 강우량을 연간 150일 넘게 드리우는 짙은 안개가 대신할 수 있는 보성이 차의 주산지가 된 이유다.

여행정보

보성다원의 또 하나의 자랑인 삼나무 숲. 곱게 뻗은 삼나무가 300만 주에 달한다.

보성읍내에서 18번 국도를 타고 율포 해수욕장 가는 방향으로 7㎞쯤 가면 활성산 봇재가 나오고 주변으로 차밭이 펼쳐진다. 광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보성행 직행버스를 타면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보성읍에서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율포행 군내버스를 이용하면 15분 정도면 닿는다. 대한다업 앞 또는 다향각 정류장에서 하차.

보성다원에서 눈과 입으로 녹차를 즐겼다면 녹차에 몸을 담가볼 수도 있다. 지하 120m에서 끌어올린 바닷물에 녹차를 푼 해수녹차탕(061-853-4566)이다. 어른 5000원, 아이 3000원. 목욕으로 허기진 배를 다시 녹차로 채울 차례다. 보성에는 녹차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이 없을 정도다. 녹차된장.녹차국수.녹차떡.녹차자장면 등. 그중에서도 녹차를 먹여 키운 돼지인 녹돈이 가장 유명하다. 보성읍내 어느 식당을 가도 6000원 정도면 10여 가지 찬거리가 갖춰진 백반을 먹을 수 있다. 문의: 대한다업 061-852-2593.

보성다원은

보성의 차나무는 일제 시대인 1938년 일본인이 종자를 처음 뿌리면서 경작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보성다원의 장기창 원장은 "일본인이 차밭을 조성하기 위해 울타리만 쳤을 뿐 실제 종자를 뿌린 것은 한국인들"이라고 강변한다. 누구 말이 맞든 보성의 맑고 고온다습한 날씨와 토양은 차의 향기와 맛의 기품에 있어 일본인들이 부러워할 정도가 됐다.

보성다원의 자랑은 차밭뿐만이 아니다. 여의도 1.5배 규모의 부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수목들이 숨은 보물이다. 곱게 뻗은 삼나무가 300만 주에 달하고 왕대죽과 오죽 등을 한반도 모양으로 조성한 담양 대나무 밭도 있다. 이팝나무와 백일홍은 물론 주목군도 있어 어지간한 수목원 못지않다. 현재는 일반에 개방되지 않은 곳이 많지만 "산책로 조성과 야외 무대 설치 등 작업을 거쳐 본격적인 휴양림으로 개발해 나갈 계획"이라는 게 다원 측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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