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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사한 공방 이제 그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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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많이 들 읽는 『삼국지』를 보면 「절영지회」(갓끈을 끊고 노는 잔치)라는 고사가 나온다.
『초나라 장왕이 어느 날 장수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장수들 틈에는 장왕의 애희를 비롯한 시녀들이 끼어 앉아 주흥을 돋우었다.
술이 몇순배 돌아 거나해지자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때마침 창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잔치상위의 촛불들이 꺼져버렸다.
장수 장웅이 거나한 술 기분에 왕의 애희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벼댔다.
목로 막걸리집 작부에게도 순정이 있다거늘 항차 왕의 총애를 받는 처지에 일개 장수의 희롱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는 법.
장왕의 애희는 추근거리는 장웅의 갓끈을 움켜잡아 뜯어쥐고 왕에게로 달려가 고해 바쳤다. 장웅의 애희 희롱은 갓끈이라는 「증거물」까지 단단히 확보된 불경의 화를 면치 못할 짓이 돼버렸다.
이제 불만 켜지면 왕의 애희를 희롱한 죄상이 명명백백히 드러날 판이었다.
그러나 왕은 촛불을 켜지 못하도록 하고는 엄히 명을 내렸다.
「모든 장수들은 즉시 갓끈을 떼어 방바닥에 버려라.」
촛불이 다시 켜지고 주연이 이어졌으나 장수들의 갓끈이 하나같이 떨어져나가 있는지라 애희가 쥐어뜯어다 바친 갓끈이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옴쭉달싹못한 증거물까지 확보했던 애희의 순정은 이렇게돼 별 볼일이 없게 돼버렸다.
그 무엄한 짓을 누가 했는지 조차 모르게 덮어버린 장왕의 너그러움은 뒷날 장왕이 주군에 패해 목숨이 위급해졌을때 몸을 던져 구해주는 장웅의 은혜 갚음으로 이어졌다.』
한해가 저물어 가는 끝머리에서 이 같은 고사를 되새겨 보고자 하는 것은 새해에는 지난해보다 무엇인가 더 성숙해야겠다는 「나이 값」에 대한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다.
한해를 보내는 나이 값으로 우선 한마디 해두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는 「이제 더는 치사하게 놀지 말자」는 것이다.
60년대 경제개발이후 우리의 생활은 경제적으론 나날이 풍요로와져 왔다.
그러나 이 같은 물질적인 성숙과는 정반대로 우리네 일상의 삶이나 사회적 처신은 날로 치사해지는 측면이 많다.
높게는 국가권력의 행사로부터 아래로는 사사로운 개인의 이해다툼에까지 걸핏하면 인신공격성 스캔들을 들추기 일쑤였고 모함투서가 난무했다.
올 한햇동안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5공 비리」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법적 차원의 위법에 못지 않은 「치사성」때문에 더욱 말들이 많았던 게 아닌가 싶다.
유신시절 어떤 국회의원의 일이 생각난다. 그는 평소 국회에서 수위 높은 발언을 해 체제유지에 비협조적이라고 점 찍혀 있었다. 결국 그는 외도한 것이 빌미가 되어 「간통」의 올가미를 쓰고 패가망신했다.
또 80년 여름 국보위시절엔 서울 태평로 한복판 국회별관에 사무실까지 설치하고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라」는 명분의 온갖 투서를 받는 해괴한 일도 있었다.
전례 없는 선풍을 일으킨 최근의 국회 청문회에서까지도 마치 개구장이 국민학교 어린이들이 여자 급우의 치맛자락을 한번 들추고 놀려대는 식의 인신공격성 신문이 적지 않았다.
정적을 타도하려면 「정치적 인격」을 죽이고, 학자를 공격하려면 「학문적 인격」을 비판해야지 사사로운 술집 작부와의 외도를 올가미로 씌워서는 당당하지가 못하다.
우리 사회의 「치사성」은 저 출세간의 성직사회에까지 번져 종교단체의 교권·종권 다툼에서도 걸핏하면 여자문제가 주무기로 등장해오고 있다.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교 청정비구 종단에서까지 종권다툼 등에 여자관계 스캔들의 공방이 난무하는 이 치사스런 현실-.
올해를 보내면서 반드시 털어 버리고 넘어가야 할 것 중의 하나는 분명히 우리의 정신연령을 퇴화시켜온 주범인 「치사성」이다.
뜨거웠던 열기를 딛고 일어선 민주화의 걸음마도 먼저 우리사회를 뒤덮고 있는 치사성 병균들을 퇴치하지 않고는 발을 떼 놓아 보았자 헛걸음이 되고 말 것이다.
1988년의 대한민국은 하나의 위대한 기록을 남겼다.
지도자는 공심의 도를 걷지 않으면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는 교훈을 새삼 일깨워준 88년의 경험은 길이 간직할만한 수확이었다.
이제 우리는 각자의 나이에 부득이 한 살을 더 보태야 한다. 한 살을 더한다는 「성숙」 의 간판을 내걸어야할 시점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6·25 전후까지만 해도 시골 대청마루에서 손자와 밥상을 마주한 할아버지들은 때마다 되풀이해 『투서질하고 시비(재판) 좋아하는 자는 인간 말종』이라고 일렀다.
누가 이르지 않아도 치사하게 놀지 않는 성숙의 나이를 더해 가는 게 바로 인간성장이다.
이제 장왕의 너그러움을 빌지 않더라도 어른스런 농세의 키스를 퍼부으며 올 망년주를 실컷 마셔볼 수는 없을까.
망년회 날 술잔에 송년유감으로 띄워보내고픈 한마디.
『우리 이제 더는 치사하게 놀지 말자.』<이은윤><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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