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혀진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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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연안에서였다. 1937년 초여름 어느 날 나는 노신도서관에서 영문책자를 빌어간 사람의 명단을 훑어보았다. 한 사람의 이름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 사람은 여름 내내 모든 종류의 책과 잡지를 수십 권씩이나 빌어가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 사람은 중화소비에트에 파견 나온 조선대표이며 군정대학에서 일본경제와 물리·화학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어떻게 그를 만날 수 있을까?』
『중국의 붉은 별』로 모택동과 오랜 교류를 나눴던 「에드거·스노」의 아내, 「님·웨일스」가 남긴 유일한 한국인 테러리스트 전기인 김산(본명 장지악)에 관한 회상, 『아리랑』(Song of Arirang>은 이렇게 시작된다. 김산이나 오성륜·김성숙 등 당시 조선인들이 중국공산당에서 활약했던 유일한 기록이 이 『아리랑』이었으면서도 지난 몇 년간 이 책은 언제나 판금도서 목록에서 해제되지를 못했다.
금년 한해동안 민주화에로의 많은 변화 가능성을 보여준 사실 중에서도 특이한 현상을 꼽을 수 있다면 이른바 빨치산 기록의 대중화였다. 이태의 『남부군』과 이영식의 『빨치산』이라는 자전적 빨치산 행적이 많은 독자들의 반응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금지된 역사의 단면을 홈쳐보는 호기심, 젊음의 피를 끓게 하는 긴박감 넘치는 빨치산의 생활상, 매몰되어 사라진 역사에 대한 복원의식, 이런 요인들이 경쳐 빨치산 기록은 의외의 호응도를 올렸다고 볼 수 있다.
지난 시대의 역사는 그것이 영광이든, 오욕이든 그냥 덮어둔다 고만해서 묻혀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만란을 무릅쓰고 그 시대의 삶을 충실히 기록, 고발함으로써 그 시대를 밝게 조명하려고 들 때 역사는 생동감 있게 살아나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다. 중국 만주 연해주에서 자신의 이상과 목표를 좇아 목숨을 내건 모험에 찬 삶을 살아갔던 그 시대 혁명아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조사와 발굴이 차제에 이뤄져야할 때가 되었다.
홍범도·김산·이동휘, 그리고 상해임정 등에 관한 개별적 또는 집단간의 연구가 북방정책의 바람을 타고 더욱 활발히 전개되길 기대해본다. 역사가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환상적 달빛이 아닌 객관적 대양 아래서 역사의 실상은 공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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