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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극의 새 장을 연 "진짜 서사극"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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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공산권 작가라는 이유로 공연 금지되어 왔던 「브레히트」작 『서푼짜리 오페라』의 한국초연(10∼18일·서울 호암아트홀)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선 20년 가까이 풀어왔던 연극계의 숙원 한가지가 풀린 셈이다. 이제 비로소 금세기 최고 연극인의 작품을 우리 무대에 올린 것이다.
또 하나는 이제 비로소 진짜 서사극을 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론을 통해서만 「브레히트」를 접해온 까닭에 본의 아니게 「한국적 서사극」이 판을 쳐왔다. 이번 초연은 재미없는 교훈주의, 혹은 사회비판이라는 「브레히트」 이론의 일면만을 단순하게 증폭시켰던 한국적 서사극과 실제의 「브레히트」극과의 차이를 체험하게 한다.
그동안의 한국적 서사극, 민중주체적 풍자극을 비롯해 요즘의 우리 정치풍토·사회의식은 대체로 흑백논리적 이원성을 띠어왔다. 착한 민중이 있고 사악한 지배층이 있다는 식이다. 이에 비해 「브레히트」의 작품세계는 세겹, 또는 그 이상이다.
그가 그린 거지·창녀와 강도들은 악하다. 「세상은 가난하고 인간은 악하다」는 현실파악에서 「브레히트」는 출발한다. 또한 그의 밑바닥 인생들은 시민계층에 못지 않은 매너, 사업수단, 법률적·종교적 외양을 갖추고 있다. 요컨대 깡패·도둑사회에 부르좌의 질서가 있듯이 부르좌 사회는 도둑의 원리로 지탱된다는 것이다.
이런 복합적인, 은폐된 풍자를 과연 관객은 알아차렸을까? 그것은 「브레히트」식의 「이화효과」를 통해 전달되었을까. 관객을 극중 내용으로부터 소격시켜 극 내용을 비판적으로 보게 한다는 이화효과론이 과연 무대에서 효력을 발생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이번 민중극단의 공연이 백점을 맞았다고 할 수는 없다. 서사극적인 냉정한 연기도 없었고 무엇보다 이화효과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쿠르트·바일」의 미묘한 곡조를 따라갈 가창력도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공연은 감격적이다. 고급 정치극의 새 장을 열었기 때문이며 또한 서사극이란 것이 싱겁고 재미없는 연극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지적인 관객들에게 이 연극은 더없이 풍요한 작품이다. 의식이 깨어있지 않은 많은 관객들에게도 「브레히트」가 염려했듯이 이 극은 생각하면서 보기에는 지나치게 재미있다. 때로는 나른하고, 때로는 의식을 긁어대며, 때로는 통렬한 「쿠르트·바일」의 음악은 과연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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