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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길영의 빅데이터, 세상을 읽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송길영 Mind Miner

송길영 Mind Miner

매주 아이와 함께하는 서점 투어는 저희 집 주말 의례입니다. 마음에 드는 책들을 고르다 보면 어떤 흐름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이동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지난주 눈길을 끈 책의 제목은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였습니다. UN 데이터에 의하면 전 세계 최빈국에서 불과 수십 년 만에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합니다. 그야말로 아웃라이어(통계적 이상치)인 나라의 국민으로서, 특히 ‘민족중흥을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세대에게는 이해하기 쉽지 않을 제목입니다.

스웨덴의 다큐멘터리 감독 요한 노르베리는 그의 책 『진보(progress)』에서 인류는 20세기에 성취된 농업혁명 이전까지 주기적인 기근으로 늘 생존을 위협받아 왔다고 설명합니다. 곡식을 키워 아이들을 먹여온 우리네 또한 ‘마른 논에 물 들어가고 새끼 입에 밥 들어가는 것 보고 산다’라는 속담에서 엿볼 수 있듯이 먼저 세대로부터 보릿고개와 험난한 생존의 기억을 구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열심히 살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은 명제와 같아, “열심히 살 뻔 했다”는 후회와 자각은 사뭇 생경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인터넷 게시판 속 중학생 아이가 수학 점수가 좋아 영재 같은데 막상 담당 교사는 재능이 없다 한다는 고민에 학부모들의 댓글이 우수수 달립니다. 유치원에서 한글을 마치고,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영어를 끝낸 아이들은 중학교에선 고등학교 수학을 다 섭렵해야 한다며 ‘한국의 영재는 선행’이라는 명쾌한 정의를 내려줍니다. 선행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더 이상 미리 할 거리가 보이지 않자 당황합니다.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회사의 신입사원 열 명 중 세명이 1년 이내에 그만둔다는 통계에서 보듯이, 열심히 자기 몫을 하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배운 사람들은 끊임없는 사회의 채근에 지치고 스러지고 있습니다.

한술 더 떠 이스라엘 출신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최근 나온 그의 책에서 우리의 일을 대신해줄 인공지능이 다가온다며 다음과 같은 섬뜩한 이야기를 던집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착취로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나쁜 지경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무관함(irrelevance, 사회에서 관련성이 사라지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함)이다.”

이런 상황 속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던 우리는 어떻게 자존을 잃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모둠 안의 누군가의 쓸모보다 그 개인의 존재 의미를 더 존중하는 사회로 진화되려는 시점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송길영 Mind Mi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