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명 발동 … 10년간 소용돌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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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66년 5월 16일.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가 긴급 소집됐다.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58~60년)의 실패 책임을 지고 2선으로 물러나 있었으나 회의를 사실상 배후에서 조종했다.

이날 회의는 중국 사회를 66년부터 10년간 광기(狂氣)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5.16 통지'라는 문건 하나를 채택했다. 사회주의 계급투쟁을 계속하고, 당.정.군에서 반(反)사회주의 자산계급 인물을 색출해 비판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튿날 공표된 이 통지문을 계기로 그전까지 문예비평운동 차원에서 진행돼 온 문혁(文革)이 권력 투쟁으로 비화했다. 이후 실권을 쥐고 있던 류샤오치와 덩샤오핑 등이 숙청된다.

그해 8월 마오가 주재한 중공 8기 중앙위원회 11차 회의에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16개조 결의안'이 발표됐으나 일반적으로 5월 16일을 문혁의 발동 시점으로 본다.

사실 문혁의 음모는 65년 초겨울부터 한편의 경극(京劇) 극본을 놓고 시작됐다. 마오의 추종자이자 극좌파 작가인 야오원위안(姚文元)은 65년 11월 10일자 문회보(文匯報)에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함'이란 경극 평론을 실었다. 해서는 명(明)나라 가정제 때의 관리로 정사를 게을리하는 황제에게 직언을 올렸으나 관료들의 모함을 받고 투옥됐던 충신이다.

이 글에서 야오는 역사학자 출신으로 베이징 부시장이던 우한(吳含)이 4년 전에 쓴 역사극 '해서파관'을 공개 비판했다. 우한은 마오의 경쟁자였던 국가주석 류샤오치와 가까웠다.

야오는 "우한이 해서의 이야기를 빌려 펑더화이(彭德懷) 전 국방부장을 숙청한 마오를 비판했다"고 몰아붙이며 권력 투쟁의 서막을 알렸다.

장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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