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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8월의 약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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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지나는 여름은 좀 서운하다. 폭염, 뭉게구름, 그리고 잠 설친 열대야와 은밀한 작별의식을 치러야 겨우 갈무리할 엄두가 난다. 기록적인 폭염을 견딘 초목도 그럴 것이다. 호박, 가지, 고추와 세 싸움을 하던 댕댕이덩굴도 얌전해졌고, 뜨거운 햇살과 땅기운이 버거워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았던 나무들도 호흡이 가지런해졌다. 저 멀리 대기 중인 가을군단(軍團)이 몰려오기 전에 ‘8월의 약속’을 이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용주의 지불 능력을 무시한 #시민운동 출신 청와대 비서관들 #소득주도 성장·주 52시간제 강행 #얼마나 많은 공장·가게 죽어나야 #이 생존 실험적 기다림 끝나는가

‘8월의 약속?’ 뭐 그리 은밀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비가 내렸던 지난봄 일요일 오후, 청와대 사회정책실에서 소득주도 성장론 세미나가 열렸다. 관련 비서관들이 모인 그 자리엔 긴장이 감돌았다. 최저임금 추진 8개월째, 추락하던 고용과 소득 지표가 정권의 야심작 ‘사람중심 경제’의 효용을 갉아먹고 있었다. 주요 언론들과 보수논객들이 회의론에서 무용론으로 돌아설 즈음이었다. 속도조절론과 부문별 차등론을 주장한 필자와 날 선 공방이 오간 끝에 타협안이 제시됐다. ‘기다려 달라’는 것. 그래서 약속했다. 8월까지 고용과 소득 지표가 개선되면 반성문을 쓰겠다고 말이다. ‘8월의 약속’이다.

진정 반성문을 쓰고 싶었다. 서민 소득이 올라가고, 주름살이 펴지며, 저녁 있는 삶이 열린다는데 까짓 반성문 아니라 용비어천가를 못 부르랴. 반성문이라면 오죽 좋으랴만 격문을 써야 하는 현실이 참담하다. 124년 전, 민생도탄에 항거해 일어선 동학농민군의 심정이 그랬을까.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은 1894년 통유문에서 이렇게 썼다. “도를 빙자하여 속인을 능멸하고 비법(非法)을 행하니… 선류(善類)가 안보키 어렵다… 사람이 사람을 상식(相食)하는 지경에 이르니 금수(禽獸)와 다름이 없다.”

소득주도 성장론은 세인을 상쟁(相爭) 속에 몰아 서로 잡아먹는(相食) 야만적 상태를 초래했는가? 3만 자영업자가 광화문에 집결하고, 소상공인이 공장을 매물 처리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고 해야 한다. 알바와 시간제 근로자가 일자리를 두고 고용주와 다투는 형편에 이르렀으니 도(道)의 전선은 을과 병의 대리전으로 확산됐다. 호남접주 전봉준이 무장포고문에서 밝혔다. “인민은 나라의 근본인데… 지금의 형편이 불더미에 앉은 것과 무엇이 다르랴.” 8월이면 정책집행 1년, 정책효과가 충분히 입증되고도 남는 기간이다. 8월의 결재는 명약관화하다. ‘사람중심(中心) 경제’는 ‘사람상쟁(相爭) 경제’로, 소득주도 성장은 ‘소득파괴 특명’으로 판명되었다.

송호근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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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기다려 달라고? 그럴 수 없다. 기다림은 비법(非法)을 행한 그대들의 것, 가게와 공장을 접고 파산과 부채에 짓눌린 고통, 메뚜기알바와 투잡 현실은 우리들의 것이다. 통계청장을 바꿔도 통계는 바꿀 수 없다. 현장이 피폐하면 선의(善意)의 이론은 악마의 맷돌이 된다. 얼마나 더 많은 공장과 식당과 가게가 갈려 죽어야 그 생존 실험적 기다림을 끝내겠는가.

한국 경제는 선진유럽과 달라서 자영업과 소상공인이 경제활동인구의 25%를 차지하고, 고용의 40%를 담당한다. 비 내리는 그날 저녁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고용과 소득성장의 뇌관은 ‘고용주의 지불능력’이라고. 경제학 원론 1장에 나오는 원칙을 시민운동 출신 비서관들은 간단히 무시했고, 한국 최고의 경영학자 장하성 실장도 웃어넘겼다. 그 후 진짜 야심작 ‘주 52시간제’가 공표됐다. 노동시간 제한은 일자리 나누기와 고용증대를 촉발할 것이라는 경제학 원론 수강생 수준의 상상리포트를 바탕으로. 임금 지불자를 제외한 이 셈법은 급기야 고용과 소득의 동반추락을 가져왔다. 기억한다. ‘자본은 항상 엄살을 피운다’는 운동권적 레토릭을. 자영업과 소상공인은 ‘자본’이 아니다. 돈은 좀 벌지 몰라도 봉급날 잠 못 들고, 납품처에 굽신거리는 을(乙)이다.

장하성 실장이 소득주도 성장의 3개 축을 재확인했다. ‘가계소득 높이고, 복지를 확충해, 생계비를 줄인다’고. 여기에 무엇이 빠졌나? 영세상공인의 지불능력! 복지는 사회적 임금(social wage)이다. 영세상공인의 지불능력을 훼손하지 않은 채 사회적 임금을 공여하면 소득증대가 어쨌든 일어난다. 54조원이란 천문학적 재원으로 최저임금 미달분, 주 52시간제로 잃어버린 임금을 개별 보충해 주면 소득이 늘고 고용은 유지됐을 것이다. 아예 빈곤층 600만 명에게 고루 나눠주면 일인당 900만원, 소득증가율 45%다. 그런데 그 돈을 다 쓰고도 왜 고용증가는 제로, 소득증가는 마이너스인가? 박근혜 정권의 독소가 아직 빠지지 않은 탓인가?

그대들은 권력이라는 위험한 수단으로 대의(大義)를 구하지 못했다. 곤궁과 파멸을 초래했다. 격문을 쓰는 것으로 ‘8월의 약속’을 이행했다면, 그대들은 무엇으로 응답하려 하는가.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