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발포명령」경위 추궁|광주특위 청문회 정호용씨 증인신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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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국회광주특위(위원장 문동환 의원)는 7일 오전 청문회를 속개,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윤흥정 당시 전남-북 계엄분소장을 증인으로 출석시킨 가운데 광주민주화운동 진압과정과 특전사 및 정씨의 역할, 발포책임자 등에 관해 신문했다.
정 전 사령관은 이날 증언에서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 발포명령에 절대 관여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고『그것은 허무맹랑한 소리이며 본인에게 무엇인가 책임을 전가해야 유리한 사람이 만들어낸 것으로 그 같은 줄기찬 음모가 있었다는 것을 밝혀둔다』고 말했다.
정씨는 진압당시 군의 발포에 대해『군은 다중시위에 대해 발포치 않고서는 진압될 수 없다고 판단하거나 자기신체·공공재산에 대한 방어능력이 없을 때 총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고『그 법적 근거는 위수령·군복무규정·헌법·정당방위개념 등이지만 군인들은 군대교육을 받으면서 이 개념은 머리 속에 들어가 있다』고 말했다.
정씨는『광주사태 최종진압 결정은 소준열 광주지역 계엄분소장이 내렸다』면서『결정 뒤 소 장군을 만나 그 같은 사실을 알았고 소 장군이 그때까지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사실을 알고 보고토록 권했으며 그때서야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전화로 보고했다』고 말했다.
정씨는 자신을 광주사태 진압작전의 지휘실세로 공격받고 있는 이유에 대해『그렇게 되어야만 자기 책임을 면할 수 있거나 자기입장이 유리하게 되는 사람들의 장난이 아닌가 생각된다』면서『일단부대를 배속시켜주면 나에겐 작전권한이 없다』고 말했다.
정씨는 자신의 지휘하에 있던 3개 여단이 광주현지부대에 파견되어 광주사태기간 중 평정작업을 했던 만큼 광주문제와 자신이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그러나 작전지휘권은 휘하부대를 배속 받은 현지부대장의 책임 하에 있었고 본인은 작전지휘책임이나 권한을 갖고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씨는『광주에 파견된 2개의 공수여단이 전교사의 지시를 받아 31사단에 재 배속됐기 때문에 31사단장의 작전지휘권 하에서 운영됐다』고 말했다.
정씨는『광주에 상주해 사태진전에 따라 공수부대를 계속 증파시켰다는 당시 향토사단장(정웅)의 얘기가 맞느냐』는 김길홍 의원 신문에『광주에 상주하지도 않았고 부대이동은 육본명령에 의해서만 할 수 있다』고 부인했다.
정씨는『박충훈 총리서리 주재의 광주지역 간담회에서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싹쓸이 발언을 했느냐』는 신문에『그런 간담회는 없었고 총리에 .대한 상황보고만 있었는데 본인이 전교사에 도착했을 때 보고가 이미 끝나 있었다』며 『전교사에 근무하는 대부분의 장병이 광주 등 전남출신인데 설사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하더라도「싹 쓸어라」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고 부인했다.
정씨는『당시 5월 22일 광주로 내려가 박 총리서리를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본인도 별도로 내려갔었다』고 말했다.
정씨는 5월17일 전군주요지휘관 회의에서 계엄확대나 국보위 설치문제를 상정한바 없고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씨는『5월 17일 계엄확대선포 전 16일 밤 공수부대가 광주에 배치되지 않았는가』라는 신기하 의원(평민) 질문에 『16일 당시도 계엄하였고 계엄사령관은 계엄확대 여부에 상관없이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다』며『16일 밤의 선발대배치는 계엄확대를 전체로 해서 파견한 것』이라고 답변했다.
정씨는 광주지역에 대한특전사법력배치와 관련, 『실제 가용병력이 별로 없는 향토사단의 계엄업무를 지원하기 위해 가까운 굿에 위치한 부대가 이동 배치되는 것이 상례』라며『광주에 가까운 가용부대는 7공수뿐이었고 그 중에 2개 대대만 광주에 배치됐으며 나머지는 전주·대전에 1개 대대씩 파견됐었다』고 말했다.
정씨는『부대파견은 육본의 작전명령에 의한 것이었고 본인의 의지는 반영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정씨는『정상적인 상황에서 우리 국군이 광주시민을 무자비하게 찔렀다거나 아녀자·어린이를 어떻게 했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고 그런 일은 절대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씨는『12·12사태나 5·17은 정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러한 사태들을 일으켜 정권을 잡겠다는 식의 쿠데타나 그런 개념을 생각해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고, 의논한 일도 없다』고 말했다.
정씨는 공수여단의 광주사태진압에 대해 『현시점에서 잘했다고 할 수 없으나 당시에는 공수여단이 수고도 많이 했고 그만하면 임무를 갈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면서『훈장과 표창은 고생과 희생에 대한 사기앙양 책으로 주어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씨는『광주·전남지역은 당초 경찰이 시위진압을 맡았고 군이 직접 나선 적이 없기 때문에 경찰보다 강한 폭동진압훈련을 박은 군이 맡을 경우 파격진압 얘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고 지적하고『과격시위와 과격진압이 되풀이되는 동안 걷잡을 수 없는 과격사태로 발전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정씨는『5월18일 오후 4시 광주시내에 공수부대의 첫 투입은 31사단장인 정웅 장군의 지휘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씨는『진압작전의 필요성이 높아져 전교사는 작전 2일 전부터 여러 계획을 구상했으나 보안상 시간·날짜를 정하지 못했다』며『26일 밤 10시 소준열 장군으로부터 27일 새벽 작전이 개시된다는 사실을 듣고 계엄사령관에게 보고해야 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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