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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은 프란치스코…11쪽짜리 편지에 가톨릭이 갈라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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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누가 프란치스코 교황을 흔드는가…음모론 불붙는 ‘가톨릭 보·혁 갈등’ 

지난 22일(현지시간) 일반 알현 도중 깊은 생각에 잠긴 프란치스코 교황. [AP=연합뉴스]

지난 22일(현지시간) 일반 알현 도중 깊은 생각에 잠긴 프란치스코 교황. [AP=연합뉴스]

12억 가톨릭 신도의 정신적 지주이자 바티칸시국의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82)에 대한 공개 퇴진 요구가 메가톤급 파문을 부르고 있다. 가톨릭 사제의 성 학대(sexual abuse) 문제에서 촉발된 이슈가 가톨릭 개혁을 둘러싼 보수vs혁신 갈등을 드러내며 상대를 겨냥한 극한의 음모론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현직 비가노 대주교 '교황 퇴진 요구' 일파만파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 학대' 가해자 은폐했다" #진보파 "쿠데타 시도" 보수파 "동성애 옹호 안돼"

문제의 발단은 지난 26일(현지시간)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77) 대주교가 가톨릭 보수 매체들에 보낸 11쪽짜리 편지다. 이 공개편지는 지난달 잇단 성 학대 의혹으로 물러난 시어도어 매캐릭 전 추기경(2001~2006년 워싱턴 대교구장)의 비위를 프란치스코 교황이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은폐하려 했다는 고발을 담았다. 비가노 대주교는 “교황은 최소 2013년 6월 23일부터 매캐릭이 연쇄 가해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서 교황의 즉각 퇴위를 요구했다. 교황은 2013년 3월 교황으로 선출됐으며 비가노 대주교는 당시 주미 교황청 대사였다.

관습상 종신직인 교황의 생전 퇴위는 2000년 로마 가톨릭 역사에서 이례적인 일이다. 지난 2013년 베네딕토 16세가 자진 사임한 것이 그레고리오 12세 이후 598년 만이었다. 교황에 대한 퇴진 요구도 충격적이지만 이를 제기한 인물이 교황을 보좌해야 할 현직 대주교란 점에서 가톨릭계는 격론에 휩싸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퇴위를 요구하는 11쪽짜리 공개편지로 가톨릭계에 파문을 불러일으킨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 대주교. [로이터=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의 퇴위를 요구하는 11쪽짜리 공개편지로 가톨릭계에 파문을 불러일으킨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 대주교. [로이터=연합뉴스]

비가노의 편지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지지해온 진보(개혁)주의자들과 이에 대립각을 세워온 보수(전통)주의자들을 각각 결집시키고 있다. 진보주의자들은 바티칸 내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 비가노의 배후에 있다고 주장한다. 개혁적인 프란치스코 교황 취임 이래 수세에 몰린 보수파가 완강한 반(反)동성애자인 비가노를 앞세워 ‘가짜 의혹’을 언론에 흘리고 있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비가노의 편지는 파격적인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취약하다고 뉴욕타임스(NYT) 등 주요 외신은 분석한다. 예컨대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매캐릭의 비위를 알고 그에게 속죄와 근신 처분을 명했다고 비가노는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공식 기록이 없고 매캐릭은 미사를 집전하는 등 공적 활동을 계속했으며 그의 사표를 수리한 것은 현 교황이다. 오히려 비가노야말로 다른 대주교 관련 성추행 수사에 압력을 행사해 진실을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편지가 공개된 시점도 의심을 샀다. 당시 교황은 아일랜드를 39년 만에 방문해 성학대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사죄하는 메시지를 발표한 후 귀국하는 길이었다. 아동 성폭력 문제를 거듭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다짐한 교황의 메시지보다 그의 '이중성'을 주장하는 비가노의 편지가 언론의 이목을 사로잡은 것이다. 이에 대해 편지를 공동 작성한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마르코 토사티는 "보수파의 음모 따윈 없다"면서 언론 공개 시점은 "우연의 일치일 뿐"라고 해명했다.

진보파들은 비가노의 편지가 오랫동안 획책되어 온 '프란치스코 축출' 계획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마시모 파지올리 빌라노바대 교수(가톨릭역사·신학)는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에서 이번 사태를 “쿠데타 작전"이라고 표현하면서 ”비가노 개인의 필요성과 교황 반대파의 요구가 극적으로 만난 결과“라고 분석했다. 뉴욕 포드햄 대학의 데이비드 깁슨 종교문화센터장도 “보수파에 의한, 다음 콘클라베(교황 선출 절차)의 캠페인이 시작된 것”이라고 일갈했다.

지난 3월29일(현지시간) 성목요일(부활절 전주의 목요일)을 맞아 프란치스코 교황이 로마 레지나 코엘리 교도소를 찾아 재소자의 발을 씻겨준 뒤 입을 맞추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3월29일(현지시간) 성목요일(부활절 전주의 목요일)을 맞아 프란치스코 교황이 로마 레지나 코엘리 교도소를 찾아 재소자의 발을 씻겨준 뒤 입을 맞추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반면 보수(전통)주의자들은 “터질 게 터졌다”면서 비가노의 편지를 ‘양심 선언’으로 규정한다. 이들에 따르면 문제의 근원은 가톨릭교 내부에 뿌리깊이 침윤한 동성애 성향과 이를 방조해온 ‘게이 로비’다. 게이 로비란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 취임 직후부터 이탈리아 언론 등에서 거론된 용어로 바티칸 내부에 동성애 성직자들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자신들의 치부를 은폐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비가노 대주교도 이번 편지에서 이를 겨냥한 듯 “교회 안에 있는 동성애 네트워크가 근절돼야 한다”고 적었다.

이런 시각에선 교황이 취임 이래 성소수자들에 대해 관용적인 모습을 보여온 것도 의혹의 대상이 된다. 예컨대 교황은 취임 초기였던 2013년 7월 기자들과의 문답에서 “만일 동성애자가 선한 의지를 갖고 신을 찾는다면 내가 어떻게 그를 심판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게이 로비'와 관련해서도 "진짜 문제는 동성애 성향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이런 성향을 가진 욕심많은 사람들이 다양하게 로비를 펼치고 있다는 점"이라고 답했다. 음모론적 시각에서라면 이런 유보적 태도는 교황이 이미 게이 로비에 휘둘려 있다는 방증이다.

이들은 교황이 동성애·이혼 등 문제에 대해 포용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 교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극단적인 일부는 “우리들의 교황은 여전히 베네딕토 16세”라는 주장까지 펼친다. 이런 ‘갈라치기’에 불편함을 느꼈는지 지난 3월엔 명예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이례적으로 공개 서한을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의 신학적인 깊이가 부족하다는 일각의 주장은 '어리석은 편견'일 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취임 직후인 2013년 3월 23일(현지시간) 로마 인근에 위치한 명예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카스텔 간돌포 별장을 방문해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취임 직후인 2013년 3월 23일(현지시간) 로마 인근에 위치한 명예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카스텔 간돌포 별장을 방문해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교황은 비가노의 편지에 대한 정면대응을 삼가고 있다. 29일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진행된 수요 일반 알현에서도 동성애에 대한 언급 없이 ‘아동 성학대’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가톨릭 교회는 아동을 상대로 한 성직자들의 성학대를 막기 위해 충분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며 "교회는 성학대 희생자들을 돌보지 못했다"고 개탄했다.

퇴위 요구에 대한 직접 반응도 없다. 다만 이날 이탈리아 언론들은 교황의 측근을 인용해, 교황이 비가노의 의혹 제기에 "괴로워하고 있지만 퇴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가톨릭계는 이번 사태를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추구해온 개혁적 가치가 다시금 "전투에 휘말렸다"(BBC)고 보고 있다. 이 전투란 세속의 각종 이슈(낙태, 이혼·재혼, 동성애 등)에 대응하는 가톨릭의 미래를 둘러싼 시각의 충돌이다. 지난 2014년 가톨릭 교회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는 이 같은 교황파와 반대파가 맞붙은 대표적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전면화된 보·혁 갈등이 '비가노의 편지'를 계기로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는 분석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애초 출발점이었던 '가톨릭 사제의 성 학대'와 아동 인권 이슈가 희석화되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성 학대라는 범죄 행위에서 동성애 포용 여부로 초점을 이탈시키는 것 자체가 잘못된 프레임의 결과라는 지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가톨릭 신학자는 본지에 “일각에서 ‘게이 로비’ 등의 자극적 용어로 본질을 호도하는 걸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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