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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대출 받아 집 샀나 … 고삐 죄는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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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 다주택자인 A씨는 지난해 강화된 기준에 따라 주택담보대출을 한 건밖에 받을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최근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집을 추가로 구매하는 데 성공했다. 금융사에서 전세자금을 대출받은 후 이 돈으로 전세 거주하면서 기존 여유자금을 활용해 ‘갭투자’를 한 것이다.

집값 잡기 총력전 … 이번엔 전세대출 #대출액 1년 새 37% 급증 이상징후 #금융당국 “집값 상승 원인 중 하나” #은행 상대로 우회대출 여부 점검 #대출 비율 축소 등 대책 나올 수도

# B씨는 C씨와의 사이에 체결한 전세계약서를 들고 은행을 찾아 전세대출을 받았다. 하지만 이 계약은 두 사람이 짜고 맺은 허위 계약이었다. B씨가 받은 전세대출은 주택구매 비용으로 고스란히 사용됐다.

금융당국이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세자금 대출을 정조준했다.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규제 강화로 돈줄이 막히자 전세자금을 빌려 주택을 구매하는 편법이 횡행하면서 주택 가격이 상승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금융당국은 시중은행 전세대출 현황에 대한 현장 점검에 착수한 데 이어 전세대출 기준도 강화하기로 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김용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28일 ‘주택시장 안정을 위한 가계부채 관리 점검 회의’에서 “전세자금 대출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주택가격 상승에 일조하고 있다는 우려가 있다”며 “전세대출이 주택 상승이나 주택구매자금으로 활용되지 않도록 전세보증 요건을 중심으로 전세자금 대출 기준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금융감독원은 이번 주부터 주요 시중은행에 대한 현장점검에 나서기로 했다. 금감원은 전세대출의 자금목적별·지역별 취급 내역을 분석해 전세자금이 다른 용도로 활용되지 않는지 점검할 계획이다. 윤석헌 금융감독원장은 같은 날 임원회의에서 “우회대출 우려가 있는 가계대출 유형에 대해 철저히 점검하라”고 강조했다. 김 부위원장도 “검사·점검 과정에서 위법 사례가 확인되면 관련 임직원과 금융사에 대해 엄중히 조치하겠다”고 경고했다.

금융당국이 전세자금 대출에 초점을 맞춘 건 먼저 대출 증가 속도가 이례적으로 빨라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6월 말 현재 가계신용 잔액은 1493조200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7.6% 증가해 증가율이 2015년 1분기 이후 가장 낮았다. 하지만 전세자금 대출은 2분기 현재 전년 동기 대비 증가율이 37.2%에 달한다. 2015년 17.6%, 2016년 25.1%, 2017년 27.9% 등 계속 증가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7월 말 기준 국내 5대 시중은행의 전세자금 대출 잔액도 56조3518억원으로 올 1월보다 10조원 가까이 늘었다. 이 중 상당액이 주택 구매 등 제 용도가 아닌 쪽으로 편법 사용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금융당국의 시각이다.

전세자금 대출은 주택담보대출과 달리 전세계약서와 확정일자만 있으면 쉽게 대출받을 수 있다. 집이 여러 채 있는 다주택자나 기존에 주택담보대출이 있는 수요자도 대출이 가능하다. 또 대출금리가 3%대 초반으로 상대적으로 낮고, 정부의 대출 한도 규제도 느슨하다. 투기과열지구에서 주택담보대출은 집값의 40%까지만 받을 수 있지만 전세자금 대출의 경우 전세금의 80%까지 대출해 준다.

금감원은 이번 현장 점검에서 시중은행들의 주택담보대출비율(LTV)·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 준수 여부를 살피는 한편 전세자금 대출의 우회대출 여부를 집중적으로 점검할 예정이다. 또 전세대출과 함께 주요 우회 대출 통로로 의심되는 임대사업자 대출의 적정성 여부도 세밀히 점검할 계획이다.

금융위는 “금감원의 현장점검 결과 등을 바탕으로 조속한 시일 내에 후속조치를 마련해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시장에서는 전세대출 요건 강화나 전세대출 가능 비율 하향 조정, 다주택자에 대한 전세대출 제한 등 조치가 시행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금융당국이 전세자금 대출 규제 강화뿐 아니라 다주택자 등에 대한 주택담보대출 LTV 추가 하향 조정 등 더 큰 틀의 대책을 내놓을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박진석·김태윤 기자 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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